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과 상상 Oct 14. 2021

아주 느슨한 행복

아픔 뒤에야 깨닫는 어리석은 인간의 행복론


  엄마는 약했고 아빠는 강했다. 엄마는 무능력했고 아빠는 가부장적이었다. 엄마에게 말해서 되는 건 별로 없었고 항상 ‘아빠에게 물어봐’라는 말이 따라왔다. 때때로 엄마가 불쌍해 보였고 아빠는 저절로 나쁜 사람이 되어 갔다.     


  내 공부의 원동력은 엄마였다. 초등학교 때 상장을 받아오면 엄마는 더없이 환한 얼굴로 그것을 액자에 고이 넣어 방 한쪽 벽에 걸어주셨다. 그 힘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한쪽 벽은 통일성 없는 액자들로 가득 찼고 나는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여학생을 잘 쓰다듬는 남자 담임 선생님이 기억난다. 체육 활동 후 스탠드에 앉아 있는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손도 만지작거리며 등도 쓰다듬으셨다. 내가 너무 성실하고 착하니 내 시험 성적보다 한 단계 높은 등급의 상장을 주겠노라는 말씀을 하셨다. 성교육이 보편화되고서야 난 그 행동의 정의를 명확히 알았지만 어린 그 시절에도 매우 불쾌했고 그 느낌은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고 여전하다. 하지만 그때는 최고 등급의 상장을 주신다는 말씀에 혹하여 선생님의 행동이 나를 정말 아껴서 하는 순수한 것이었노라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만큼 상장은 내게 절대적인 의미였다.     


  엄마의 행복이 내 행복인 양 살아왔지만, 머리가 굵어질수록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노라 다짐을 했다. 동시에 아빠와 정반대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겠노라 목표를 세웠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던 것 같다. 이·문과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던 내가 엄마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빠는 항상 그렇듯이 주제를 벗어나 교대나 사대를 가라고 하셨고 엄마 역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잘 모르겠다며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뭘 그렇게 괴로워했나 싶지만, 그때는 이과와 문과의 선택이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며 본인의 선택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던 당시 인기 예능 같았다. 그만큼 절박했던 내 고민 앞에 무능력과 무기력을 보여준 부모님을 보며 내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며 아빠와 반대의 남자를 만나 결혼할 것이다   

  난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정진했다. 엄마와 다르게 살려면 아는 것이 많아야 했고 당당해야 했으며 강해야 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떨리는 순간에도 감정을 부정하며 대범한 척했으며 매사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그런 내 모습이 좋다는 남자가 나타났다. 말수가 적고 매번 본인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이 남자는 얼굴까지 맘에 들었다. 무녀독남 외동으로 곱게 자란 듯했고 항상 내 의견을 존중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게 맞나 보다

 나에게 빠진 이 남자는 대학생 때부터 결혼을 졸랐다. 어느 집안에서 직업도 없는 남자에게 딸을 주냐며 남자의 엄마는 졸업부터 하라고 타일렀다. 남자는 전에 없던 열정과 추진력으로 취업을 위해 정진했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둘 다 이른 결혼이었지만 내겐 아직 달성해야 할 계획이 많았으니 그중 하나가 자녀계획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성별과 원하는 자녀수까지 달성(?)하고야 만다. 그리고 세상은 열심히 살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오만이 버무려진 자신감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살게 된다.   


  아이들은 엄마를 빛내주기에 충분했다. 리더십이 있었고 공부도 곧잘 했다. 예술제를 하면 주인공도 맡아오고 교우관계도 원활했다. 엄마와 반대로 살기로 작정한 나는 똑똑한 엄마가 되어야 했기에 아이들 공부도 소위 엄마표로 달렸다. 방학이면 모든 학원을 중지하고 산으로 들로 다녔다. 박물관도 과학관도 섭렵했고 갖은 체험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아이들에게 치우는 방법도 가르쳐줘야 한다는 남편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며 욕실에서는 물감 놀이, 주방에서는 요리 놀이를 해댔다. 친정아버지 닮아 체력이 좋았던 나는 터울 없는 아이 셋을 혼자 데리고 다니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고 체력이 달려서 애 못 보겠다던 친구들의 말을 공감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내게 제대로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기 때부터 ‘자주 독립군’이라는 별명을 달고 있는 둘째의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다. 첫째의 사춘기도 물론 힘들었으나 첫째와 둘째의 사춘기는 내전과 세계대전에 비유함직했기에 첫째의 그것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귀엽게 우쿨렐레를 연주하던 아이는 일렉 기타를 앰프에 연결해 연주를 했고, 예술제 때 입술이라도 찍어 바르려 하면 질색 팔색을 하던 아이는 아이라인을 곱게 그려댔다. 엄마에게 점수 자랑하기 바빴던 아이가 이제는 자기 성적을 알 생각도 하지 말란다. 네 살부터 그래 왔듯 ‘알아서 한다’는 말을 남기며…. 무엇보다 저 아이의 분노의 근원은 무엇이며 짜증의 원인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속이 탔고 대화를 시도하려다 볼 꼴 못 볼 꼴 본 적도 있으니 ‘내가 애를 잘못 키웠나?’라는 의문으로 옛 기억을 되짚기 일수였다. 나는 싸이월x, 카카오스토x 까지 열심히 했던 엄마라 예전 사진을 뒤적이며 눈물 바람과 청승의 밤을 보낸 것은 남편도 모를 거다.    

 

  그나마 고등학생이 되어 제법 엄마 맘도 이해하고 대화가 되는 큰딸이 나의 위로였지만 그런 딸이 이번 여름에 쓰러졌다. 겁이 많은 아이는 쓰러진 원인이 있을 거라며 찾고 싶어 했고 방학 동안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원인 찾기에 매달렸다. 결론은 불규칙한 식습관과 생활 습관에 과로와 카페인 부작용이 복합된 것이었지만 학교와 119의 전화를 받으며 응급실로 달려가던 경험을 두 번은 하고 싶지 않다.


  큰딸이 여전히 침대에 누워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던 어느 날 밤, 세상의 모든 불안이 내게 물밀듯이 밀려오는 경험을 했다. 코로나 팬데믹 2년 차가 되도록 걱정 한 번 안 했던 나였고, 혹시나 남편이 없어도 애들 건사하며 잘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만큼 겁도 철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나의 망각이고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나는 그저 자식의 아픔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나약한 여인일 뿐이었다.      


  더딘 회복기 중의 어느 날 밤 엄마와 같이 자고 싶다고 큰딸이 찾아왔다. 항상 그렇듯 내 손에 깍지를 낀다. 나를 바라보는 그 까만 눈을 보니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는 난생처음으로 내 얘기를 털어놓았다. 불쌍했던 내 엄마와 무서웠던 내 아버지 얘기를, 나는 그들처럼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최선을 다해 살았던 얘기를 말이다. 두 분이 싸우면 참 불안했던 내 유년 시절도, 기숙사로 탈출해서 행복했던 내 고등학교 얘기도, 낮에는 신나기만 했던 내가 밤이면 가위에 눌렸고 그게 고등 삼 년 내내 이어졌던 이야기와 과외를 두세 개씩 하며 보냈던 나의 대학 이야기까지.     


  윤아, 엄마는 열심히 살면 다 잘 되는 줄 알았어. 할머니와 반대로 살고 할아버지와 반대인 사람 만나면 행복할 줄 알았어. 하지만 지금 엄마가 외할머니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닌 것 같아. 엄마와 이모 삼촌들에게 그저 믿는다고 말해줬던 할머니가 승자 같아. 엄마가 새벽에 공부하면 항상 자다 깨셔서 이제 그만 자라고 하신 할머니였거든? 엄만 그게 그렇게 화가 나더라. 딸이 공부하는데 주스라도 한 잔 못 가져다줄망정 하품을 하며 자라고 말하던 할머니가 참 야속했어. 엄마가 고민이라고 하고 있으면 그저 다 잘 될 거라고 하던 할머니가 답답했고 묵묵히 지켜만 보던 할머니가 미웠어.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삼남매에 대한 믿음으로 맘 편히 사신 할머니가 위너야. 너 낳기 전에도 열심히 살았고 너 낳고 나서는 더 아등바등 살았던 엄마가 지금 참 바보 같이 느껴지는 밤이다.     


  윤아, 하고 싶은 일은 열심히 하되 이루지 못했다고 좌절하지는 말자. 엄마가 살아보니 인생에는 운이라는 무서운 복병이 있더라고. 베짱이처럼 놀면서 요행을 바라는 몰염치는 안 되지만 죽을 만큼의 최선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너희들이 내 옆에서 건강히 있으면 족하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쓰면 엄마 너무 노티 나니? 라테인 거니?    

 

  윤아, 불행은 너무 명확해서 참 잘 보이거든? 때로는 폭풍처럼 창문을 깨며 밀어닥치기도 하고, 해일처럼 밀려들어 정신을 못 차리게도 하더라. 엄마는 행복도 그렇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 엄마가 열심히 살면 행복이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박차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밀려들 거라는 착각 말이야. 그런데 행복은 아무 일이 없는 매일매일이었어. 우리집 막둥이가 엄마 눈 요리조리 피해 종일 놀다가 저녁에 혼이 나는 일상도 건강하니 가능했던 거고, 우리 ‘자주 독립군’께서 벌이는 모든 일도 열정과 에너지가 있어서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네. 말없이 지켜보는 아빠가 답답했는데 아빠까지 열정남이었으면 어땠겠니? 아찔하지 않니? 이제야 박봉의 월급으로 처자식에 부모님까지 일곱 식구를 꾸리고 살던 네 외할아버지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단다. 콩나물 100원이라도 깎아가며 매끼 정성스레 밥상을 차리던 할머니의 노고가 느껴지는 밤 말야.      


  윤아,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이 자차와 자가가 있어야 하고, 매년 가는 해외여행에 연봉은 얼마라더라? 그런 평균들과 기준들에 맞추느라 항상 엄마는 내 자신이 부족해 보였는데 이번 기회에 그 평균을 자체적으로 느슨하게 만들기로 했다. 누가 뭐라고 하겠니?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셔서 너희들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시니 행복하다. 아빠는 삼남매 전쟁통인 상황에서도 다른 방에서 폰을 하는 여유가 있는 분이라 행복해. 하하! 무엇보다 자식은 건강히 살아서 내 옆에 있으면 행복한 거였어. 외모가 잘나서도 공부를 잘해서도 말 잘 듣고 착해서도 아니었다는 걸 너의 아픔으로 완전히 깨닫게 되었단다. 엄마 진짜 잘 알아먹었으니 복습은 필요 없는 거 알지?   

   

  우리 좀 느슨하게 살자. 평균도 기준도 좀 늘려가며 그렇게 살자. 세상은 참 살고 볼 일이네. 열심의 아이콘이었던 엄마가 느슨한 행복을 외치는 사람이 될 줄이야. 이런 삶이 더 행복한지는 네가 옆에서 지켜봐 줘. 엄마 느슨하게 천천히 잘 가고 있는지.

작가의 이전글 호적이 없는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