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매-어릴 때 나는 할머니가 아닌 할매라고 불렀다-는 절에 열심히 다니셨고 주변에서 보살님으로 불리셨다. 나와 동생은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따라 집 근처 절에 다녔었다. 교회 오빠라는 말은 있어도 절 오빠라는 말은 없기에 설레거나 재미진 기억은 없지만 여전히 법정, 법륜 스님이 좋고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뜻 모를 법문이었지만 서당 개 생활 덕에 반야심경도 얼추 외울 수 있었고 찬불가도 불심 담아 부르게 되었다. 예불 후 먹는 나물 비빔밥이 어찌나 맛있던지 어떤 비빔밥 맛집에서도 그때 그 맛을 느낄 수가 없다.
부처님 오신 날은 불교에서 가장 큰 행사였기에 그 기간이 되면 나와 동생은 엄청 들떴었다. 초파일 한참 전부터 연등행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고사리 손으로 만들었던 기억도 난다. 만들었다기보다는 찝쩍거렸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어느새 거대한 코끼리도 연꽃도 완성되어 있었다. 조명까지 밝히면 우리만의 루미나리에 축제가 시작되었고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부처님 오신 날 밤에는연등을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 화려한 조명이 번쩍거리는 행렬의 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 왜 그렇게 자랑스러웠을까? 모두 나를 쳐다본다는 착각을 하며 미스코리아라도 된 냥 걸었고 흔들어 주는 손들이 나를 향한 것인 듯 기분이 좋았다. 늦은 밤까지 온 시내를 걸어 다녀도 다리 아픈 줄도 몰랐으니 불교는 내가 몸 담아야 할 종교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불교는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었다. 불교와 절은 나에게 기복 신앙으로서가 아닌 그저 우리 할매 따라가서 먹고 놀던 놀이터였다. 무엇을 그리도 간절히 빌었던 것이었을까? 회색 승려 바지를 입고 두 손 열심히 비비며 중얼거리시던 우리 할매가 보고 싶다.
그런 내가 중고등 학교는 미션스쿨로 갔다. 재단이 교회였던지라 시간표에는 종교시 간이 있었고 학교에는 교목(목사님)께서 상주해 계셨다. 매일 아침 예배로 학교 생활을 시작하였고 부활절이나 성탄절은 학교의 가장 큰 행사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에는 주로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의 자제, 독실한 모태신앙의 친구들이 많이 왔다. 내가 전도에 있어 도전의식을 일으키는 스타일이었는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날 전도하려고 최선을 다한 친구들이 많았다. 그렇게 친구를 따라 중학교 때 교회 문턱을 넘었고 난 교회 오빠의 존재를 알아버렸지.
나에게 관대했던 엄마는 크리스마스 전날 교회에서 하는 '올 나이트'에도 흔쾌히 보내주었다. 밤을 새우며 복음성가도 부르고 성경 말씀도 들으며 신실한 종교인이 되고팠지만 내 시선은 드럼을 쳤던 교회의 그에게 꽂혀있었다. 그렇게 나의 교회 생활은 불순한 의도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역시 교회 재단의 학교로 갔다. 그때 이사장님이 지금 부자 세습으로 시끄러운 대형 교회의 목사님이시다. 학교에 최신 기숙사도 지어 주시고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그 혜택을 참 많이 본 나로서는 최근의 뉴스들로 마음이 안 좋은 것이 사실이다. 부자 세습 같은 거 하지 마시고 성직자로서 존경받으시길 바라는 개인적인 마음이다.
여고시절, 나는 장난의 아이콘이었다. 우리 고3 담임 선생님의 입버릇은'어휴 부회장님, 부회장님~~ 제발! 공부만 못했으면 너는...'이었다.'너는' 뒤의 말이 뭘까 궁금했지만 다정한 아빠 같던 선생님께서는 누구에게도 강한 처벌을 하지 않으셨다. 청소만 못했어도 너는, 숙제만 못해왔어도 너는, 달리기만 못했어도 너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시며 모두를 용서해 주셨던 분이었다.
그런 내가 고3 때는 학급 부회장이 되었으니 그건 종교부장을 겸임한다는 의미였다. 부회장은 학급 종교행사를 진행해야 했고 보통 세례가 있는 친구들이 했다. 난 세례가 없는 최초이자 유일했던 부회장이었으니, 이는 장난꾸러기가 신실한 종교인 행세를 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친구들의 작당모의 결과였다. 내가 교단에 서서 복음성가에 맞춰 율동을 할 때면 친구들을 큭큭대며 웃어 대기 일쑤였다. 사이비 종교인 이라며 어찌나 놀려대던지 그 친구들은 다 잘 살고 있으려나?
하지만 장난도 진지하게 하니 진심이 되는 것 같았다. 어느새 구약 신약 성경의 순서부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전부를 암송하며 다녔고 학교나 교회에서 대표 기도를 술술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안했던 수능 전날에는 친구들과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안수기도를 받는데 얼마나 눈물을 콸콸 흐르던지 지금 생각해도 당황스러웠던 기억이다.
그렇게 거의(?) 교인이 된 것 같았던 내가 대학을 가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더라. 제대 직후에 개과천선 한 것 같은 남자들이 한 달만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그 패턴이 확실히 이해되는 시점이었다. 대학을 같이 온 고등학교 친구는 여전히 CCC라는 기독교 동아리에서 종교 생활을 충실히 하며 타락한 어린양을 되돌려 놓고자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그 친구는 CCC 순장님과 결혼해서 여전히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두고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날 완전히 포기한 것 같다. 귀농한 그녀는 손수 지은 농작물이나 보내주며 소식을 간간히 전하고 있다.
졸업을 하고 교사가 되어 두 번째 발령받은 학교는 다문화가 대구에서 두 번째로 많은 학교였다. 다문화 가정의 상당수가 국제결혼으로 인한 동남아시아 다문화였지만 우리 학교는 이슬람 다문화가 많았다. 근처에 이슬람 사원도 있었고 학교 바로 앞에는 이슬람 식재료를 파는 작은 가게도 있었다.
부모님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도 히잡을 쓰고 학교에 왔다. 급식대에는 이슬람 문화에서는 먹어서는 안 될 음식 대신 먹을 수 있는 할랄 음식 코너가 따로 마련되었다. 수업을 할 때는 무의식 중에라도 다문화를 폄하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했고, 학부모나 학생 상담을 할 때도 종교적으로 예민할 수 있는 행동을 삼가도록 교육받았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인도에 가면 인도법을 따르라는데 얼굴만 조금 내놓는 의상을 입고 학교에 오니 체육을 포함한 활동적인 수업에 제약이 있었다. 융통성 없는 그들의 종교 제일주의가 살짝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키스탄 분과 결혼한 한국인 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파키스탄으로의 이민을 결정했다는 소식에 나의 편견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거기는 현지인이 살기에도 여자 혼자 몸으로는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국적도 피부색도 다른 한국인 어머니께서 코란을 지키는 삶을 위해 남편도 없이 그곳에 가겠다니 종교의 힘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알겠더라. 아버님은 한국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라 어머니와 아이들만 간다는데 진짜 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걱정 가득한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이렇듯 나의 삶에 여러 종교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지금 나는 무교다. 종교인으로서 신실한 삶을 사는 분들을 볼 때면 그들의 믿음이 부럽기도 하고, 많은 종교를 밀접하게 접했지만 믿는 종교가 없는 내가 신기하기도 하다. 다만 종교의 샐러드볼(salad ball)로 살면서 종교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거 하나는 제대로 배운 것 같다. 세계 3대 종교를 모두 경험해 본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 그래!
절에 가면 한없이 편안해지는 마음처럼, 수능 전날 눈물의 통성기도처럼, 종교를 목숨처럼 여기는 지난 학교의 학생들처럼 나도 믿음을 가지게 될 날이 올지는 더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