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참 다른 사람이다. 성격부터 취향까지 비슷한 게 없었으니 가족계획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소 셋은 낳아서 알콩달콩 살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남편은 애가 없어도 괜찮다는,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만 낳던지 나는 없어도 괜찮다.
당신은 외동으로 자라 형제지간의 우애를 모르니 외로웠겠다고 물어본 적이 있다. 전혀 그런 적 없었다네. 그래도 혼자면 심심할 때가 있지 않냐고 했다. 그럴 때는 친구랑 놀아서 괜찮았다고 한다. 친구랑 가족이 같냐고 했더니 놀 때는 친구들과 재밌게 놀고 집에 오면 조용히 지낼 수 있는 환경에 만족했단다.
남편의 조용한 성격도 외동으로 자란 환경 탓이었으며 자식 욕심이 없는 이유도 형제애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었다. 혼자 자란 남편은 외롭고 심심했겠거니 확신했고 나는 삼 남매 속에서 즐겁게 살았기에 풍요롭고 안정적인 정서를 가진 거라며 자만도 했었다. 외롭게 자란 남편에게 자식을 많이 낳아 북적임 속의 행복을 맛보게 해 주겠노라 다짐도 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운전을 하고 가는 길이었다. 마침 라디오에서 시사적인 내용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방송되었고 외동과 다둥이 가족의 만족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보통 외동은 혼자 오냐오냐 자라서 사회성이 부족하고 제 멋대로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조사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인이 자란 가정에서의 만족도를 조사하니 외동들의 만족도가 다둥이들의 만족도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결과에 대한 원인을 조사해보니...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는 동생들과 모험에 가까운 장난도 해보고, 죽일 듯이 싸워도 보고, 심심할 땐 더없는 친구가 되어도 보고 슬플 땐 서로에게 위로가 되며 만족스럽게 컸다고 믿었는데 의외의 결과였다. 그제야 본인의 어린 시절에 만족했다는 남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렸고, 견고하리만큼 편협했던 나의 고정관념도 깨지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편은 정리정돈을 참 잘한다. 쓴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두고 청소도 수준급이다. 어렸을 때는 본인 물건이 항상 생각하는 그 자리에 있어서 편했단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과 결혼 함과 동시에 물건은 일단 찾아야만 사용 가능한 것이 되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더 심각해졌으나 나는 애들 키우는 집이 다 그렇지 않냐며 가볍게 넘겼었지.
시부모님이 아이스크림을 사 와도 몇 숟가락 퍼먹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언제 열어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단다. 하지만 둘째가태어나면서 남편의 멘붕은 시작되었다. 아이스크림을 여러 개 사 와도 항상 싸우는 아이들을 그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딸들의 다양성을 존중한답시고 다양한 선물을 사 오며 드라마에나 나오는 행복한 가정을 기대했겠지만 결과는 항상 다툼으로 끝이 났다.
내가 많이 사주잖아. 내가 안 굶기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저런 거야?
처참한 표정으로 저 말을 하던 남편이 잊혀지지 않는다. 난 대수롭지 않게 두 명 이상이면 일단 싸우고 보니 무조건 똑같은 걸로 사 오라는 부탁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야 남편이 하는 말을 진실로 듣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제야 가정에서 시기, 질투, 경쟁, 분란, 갈등, 미움 등의 감정을 겪지 않고 평안하게 자란 남편이 제대로 보였다.
내가 하는 말이 외동에 대한 비하 발언이라 생각해서 과대 포장하는 남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감정의 쓰레기통 속에서 처절하게 싸우며 살아온 건 나였다. 힘들었던 시간들을 즐거웠던 순간으로 덮어버리고 난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노라 착각했었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내 동생들을 택하고 함께 보낸 그 시절을 원하겠지만 편협한 시선으로 남의 삶을 무시했던 태도는 진심으로 반성한다.
오늘은 막둥이의 열 번째 생일이다. 셋째 임신소식을 알렸더니 남편은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놓은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기어이 셋째까지 임신한 '신궁'에게 경의를 표하며 본인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가정에 충성하겠노라 다짐도 했었다. 신궁은 첫째와 셋째 산부인과 주치의께서 지어주신 별명이다. 아이를 낳자마자 원래 상태로의 회귀가 빠른 자궁에 대한 경이로움의 표현이란다. 무려 셋째 주제에 달을 넘겨 나오질 않나 장시간 진통을 하질 않나. 출산 당일까지 그 별명은 계속되었고 벌써 10년이 지났다.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 발언이 아님을 강조함)
매년 5월 2일의 막둥이
이제는 나보다 더 무뎌진 남편, 더러운 건 눈을 작게 뜨고 지나가면 된다는 남편, 애들이 싸우면 모른 척하고 놀러 가자는 남편, 막내가 스무 살 되면 모든 의무를 내려놓겠다며 매년 카운트하며 부부 중심이 되는 날은 기다리는 남편이다.
나쁜 눈까지 자기를 닮았다며 뿌듯한 미소를 날리는 남편이 이제는 진짜 다둥이 아빠가 된 것 같다. '애들은 원래 싸우며 큰다'며 이제는 나보다 더 초월한 것 같은 말을 할 때면 시간의 변화가 놀라울 뿐이다.
애가 최소 셋은 돼야지.
외동 예찬론자였던 우리 남편 맞나? 막둥이 탄생 10년 되는 날 갑자기 철없던 옛날 생각이 나서 몇 자 적어본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해하기의 연속인 삶이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우리 아이들 셋이다. 로망은 넷이었노라 얘기할 때면 여전히 낯빛이 노래지는 남편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