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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과 상상 May 17. 2020

금남로의 추억

5.18을 기리며

광주의 추억 1


아마 초등학교 6학년쯤이었지 싶다. 언제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때의 상황은 또렷이 기억난다. 경상도 학생이 광주로 소풍을 갈 일도 없었고 수학여행을 갈 일도 없었다. 지금도 지역갈등이 있지만 그때는 절정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때 걸스카우트 활동을 하며 잼버리 활동의 일환으로 야영, 행사, 체험 등을 경험했는데 내가 전라도에 간다면 그 활동으로서만 가능했으리라.


그 나이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반공사상이 투철한 아버지께서는 가기 전부터 지레 걱정을 하셨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갔다가 맞아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며 공포를 조장하셨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카더라 통신'의 위력은 대단했을 테니 이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에 십 대 초반의 어린 소녀는 겁을 먹기 충분했으리라.


광주는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으로도 먼 곳이었지만 물리적 거리도 참 멀더라. 고속도로랍시고 있는 게 어찌나 볼품이 없는지 가뜩이나 멀미가 심한 나는 괴로운 여행길이었다. 드디어 버스는 휴게소에 멈춰 섰고 나는 누구보다 빨리 버스를 탈출하고 싶었다. 내리자마자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도 전에 옆에 버스의 아저씨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힌다.


"저 애들 경상도에서 왔나 부러."


나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저씨들의 시선이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버지 말대로 우리한테 해코지라도 하려나 싶어 속된 말로 쫄아버렸다. 그 뒤의 상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저 아이들 경상도에서 왔다'는 그 한마다가 나에게 광주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어 버렸다.



광주의 추억 2.


대학을 갔다. '부모가 뼈 빠지게 돈 벌어 대학 보내 놨더니 빨갱이 짓 한다'는 우리 아버지 말씀이 사실인가 싶어 소위 운동권이라고 일컫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뉴스에서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만 나올 때마다 하시던 우리 아버지의 고정 멘트를 검증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었다. 돌이켜보니 참 말 안 듣는 딸이었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같은 책을 읽으며 배우지 않은 역사를 알게 되었고, 부모 배신한 나쁜 자식들은 일신의 안락을 추구하지 않는 소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난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은 5.18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선배들은 5.18을 기리기 위해 광주행을 결정했다. 새내기가 된 후 겨우 두 달, 나는 7~8년 만에 가는 광주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렸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광주로 가기 전 배운 오월의 노래 가사다. 캠퍼스의 낭만을 기대했던 스무 살 여대생이 부르기에는 참 힘든 노래였다. 나중에 들었으나 노래 가사가 너무 사실적이라 5.18 유족들조차 부르기 힘든 노래라고 한다. 배우면서도 입을 떼기가 어려웠음은 허구나 과장이 아닌 정확한 사실이라 그랬던 게 아닐까?


5.18 묘역에 가서 묵념을 하며, 금남로를 행진하며 , 전남도청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저 노래가 얼마나 슬프고 처절한 노래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역사를 좋아하던 나는 왜 스무 살이 되기까지 5.18을 몰랐는지 궁금하고 답답했다. 그 이후로도 아니 지금까지도 대구에서 5.18은 언급되지 않는 역사다.


광주의 추억 3


가장 친한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동창이니 엄청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 친구가 남편 직장을 따라 광주로 가게 되었고 다시 광주는 내게 다가왔다. 친구를 보러 가기 위해 88 고속도로를 타는데 어쩜 이렇게 내가 어렸을 때와 달라진 게 없는지 의아했다. 남편은 이 길이 얼마나 위험한 길인지 아냐고 잠시 정신 안 차리면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도로라고 설명한다. 이십 년이 지나도 도로 하나 변하지 않았구나 싶다.


친구네서 하룻밤을 잔 후 다음날은 역사 투어를 계획했다. 분명 밤을 새우며 회포를 풀게 뻔했지만 광주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엄마표 역사투어에 익숙한 어린 삼남매는 메모지도 챙겨 들고 앞장선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5.18 자유공원과 기념공원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광주 가기 전 '화려한 휴가'를 미리 보고 갔기에 그때의 역사를 재현한 곳마다 아이들의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슬프기보다는 무섭다고 했다. 화려한 휴가는 내가 먼저 본 영화라 딸들이 보기 힘든 장면마다 넘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이해할 만한 역사는 아니었다.


유치원 생이던 막둥이는 막 한글을 깨쳐서 쓰는 재미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오늘 둘러본 곳의 느낌을 방명록에 적어보라니 막둥이는 '싸운 사람들'이라고 적었다. 그걸 본 남편과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이들의 눈에는 서로 죽이며 싸운 역사고 만나기 무서운 역사였다. 이런 비극이 이 땅에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와 마주하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대구에서 교사를 하는 지금 우리에게 5.18은 여전히 별 날이 아니다. 광주에 사는 친구가 아니었다면 다 그런 줄 알았을 것이다. 광주에서의 5.18은 축제라고 한다. 친구의 업무가 학교 행사였던 해는 5월이 참 바빴다고도 했다. 학교마다 현수막도 걸고 학생들에게 할 계기 교육 자료도 준비하며 분주하게 보냈단다. 


세 시간도 채 안 걸리는 두 지역의 온도차가 이렇게나 다르다. 초등학교 때 광주 휴게소의 아저씨들의 눈빛은 진짜 위협적인 그것이었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아니라는 생각이 했다. 그저 교류가 없던 지역이 아이들이 우르르 버스에서 내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모습이 신기했을 것이다. 광주는 무슨 일로 왔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시나브로 세뇌된 이미지로 광주를 봤기에 모든 것이 내 왜곡된 시선이었음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광주교대 동기와 선배들은 모두 유쾌하고 친절했다. 먼 길 찾아준 대구의 대학생들이 불편할까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 친구는 광주가 제2의 고향이라고 한다. 광주에서의 시간이 좋았기에 나오는 말이겠지. 멀쩡한 사람들을 머리 뿔 달린 괴물론 그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시절 프레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광주 중심지를 돌아보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있다. 

'TK 싫어할 만하네' 

가장 중심지가 핫플레이스 같지 않았다. 광역시라는 타이틀을 붙였지만 그만한 스케일의 시내가 아니었다. 광주를 한 바퀴 돌아보며, 대통령이 배출된 곳만 발전했으니 우리가 얼마나 미웠을까 이해가 됐다.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에서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라는 말이 나온다. 강대국을 비롯한 세계 많은 나라들의 역사교육의 내용은 바로 내가 태어나기 직전의 역사라고 한다. 그렇기에 근현대사가 역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나 역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역사는 동굴에서 살던 역사가 아닌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바로 그 지점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그때의 역사는 위정자들과 기득권층에서 잊혀야 할 역사가 되었다. 그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면서 우리는 월북한 독립운동가도, 제주 4.3 사건도, 광주 5.18도 배우지 못하며 살아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서 미래는 없다는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라도 역사 마주 보기에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월이 되면 항상 떠오르는 생각이다.




계엄군과 공수부대에 의해 잔악하게 희생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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