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부산문화회관과 부산 오페라계의 공동적업으로 매년 풍성하게 장식해 온 ‘부산 오페라 Week’. 올해는 세 개의 선정 작 중 솔 오페라 단(단장 이소영)의 ‘카르멘’이 지난 10월 17일 18일 양일 간 부산 문화회관 대극장에 올랐다.
카르멘, 달콤한 욕망과 사랑을 거침없이 선택할 줄 아는, 자유를 갈망하는 집시..
오페라 카르멘은 하바네라, 세기디야, 투우사의 노래 등 유명 아리아 선율로 익숙한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오페라지만 부산에서 전작을 만나기 힘든 작품이기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막이 오르고 김봉미의 지휘에 KNN교향악단의 박진감 넘치는 전주곡이 스페인의 정열적 멜로디에 이어지는 운명을 암시하는 비극적 선율이 복선을 깔았다. 군중들과 담배공장 여직공들이 몰려나온 후 카르멘이 등장을 기다렸다. 메조소프라노 쥬세피나 피운티가 쏟아 낸 농염한 하바네라와 세기디야는 갈채를 불러일으켰다.
피운티의 황홀한 카리스마에 대조되는 미카엘라 역을 맡은 소프라노 김유진은 청순하고 헌신적인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볼 수 있는 프리마돈나의 이미지로 청아한 무대를 만들었고 호세 역의 테너 김준연과 ‘사랑의 2중창’에서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앙상블을 보여주었다.
이 오페라의 백미는 역시 에스카미요의 등장이다. 호탕하고 위풍당당한 투우사의 등장에서 엘리아 파비앙의 출연은 청중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뭇 여성들의 흠모의 대상으로 카르멘의 사랑을 움직이게 한 남성미를 뿜으며 부른 ‘투우사의 노래’에서 가창력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운명의 끈을 놓지 않는 구성력
1막의 높은 성벽을 배경으로 마을 군인들과 담배공장 직공들이 출연하며 이야기가 시작됨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를 회색빛 성벽이 암시했다. 2막의 선술집 장면은 끊을 수 없는 자유로움과 유혹이 카르멘의 춤을 통해 도전적이고 관능적인 여성미를 보여준다. 어두운 밀수업자들의 은신처인 3막에 이르러 카르멘으로 인해 모든 인생이 변해버린 채 탈영까지 한 호세와 그녀와의 사랑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며 마지막 4막인 세비아의 투우장은 거친 그들의 사랑이 싸움과 질투로 치정에 얽혀 무대 상단 마르고 앙상한 가지에서 강하고 야생마 같은 죽음을 각오한 비극적 결말이 기다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집시 여주인공, 성실한 돈 호세, 호세와는 다른 결을 가진 남성다운 에스카미요와 헌신적인 미카엘라 등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 대결, 이별, 욕망을 4막의 무대전환으로 회화적 요소를 통하여 재현하려는 의도가 짙게 나타났다. 결국 네 사람의 사랑과 갈등은 죽음으로 집중되었지만 인간에게 뿌리박힌 본능적인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결말로 치밀한 구성력이 오페라의 완성도를 높였다.
초호화 캐스팅
주연에 따라 흥행의 판이 달라지는 영화처럼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가창력만으로 오페라 주역이 될 수 없으며 출연자 간 밸런스가 맞지 않아도 몰입도가 떨어진다. 메조소프라노 쥬세피나 피운티에게서 비쳐진 카르멘은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를 오가며 유연하고 개성 있는 음색으로 유수 극장의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이 인정 될 만큼 팜므파탈의 경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에스카미요 역의 바리톤 엘리아 파비앙은 17세에 데뷔하여 밀라노의 스칼라좌와 나폴리 산카를로 극장 등 이탈리아 전역의 오페라 가수로 두각을 드러낸 실력을 짐작 할 수 있는 힘찬 에너지를 뿜어냈다. 돈 호세의 테너 김준연은 스페인 언론에서 “동양에서 온 최고의 테너”라는 찬사에 걸 맞는 자연스런 음색으로 성실한 군인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소프라노 김유진은 단단한 가창력을 바탕으로 청순한 미카엘라에 충실하게 다가갔다. 베이스 이대범의 주니가역 또한 흡인력 있는 연기에 정확한 딕션과 풍성한 가창력이 돋보였다.
높은 완성도와 화려한 무대 디자인
오페라는 흔히 종합예술이라 부르듯 제작과정에 있어 음악의 비중이 우선이기도 하지만 연극적 요소, 연출, 무대, 조명, 안무, 오케스트라에 전문성과 예술성이 동반되어 세심하게 총체적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다양한 매체에 사로잡히는 청중들에게 순수 예술 장르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기에 오페라는 더욱 제작에 빈틈이란 있을 수 없다. 솔 오페라단은 2005년 창단하여 부산은 물론 유럽무대에 우리나라 창작오페라를 소개해온 기획력과 저력이 연주자와 관객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오페라 무대를 만들어 왔다. 세계적인 무대 디자이너 쟈코모 안드리코의 세련된 무대 세트와 어울리는 세련된 색감의 의상, 쟌도메니코 바카리의 날카롭고 섬세한 연출력으로 성악가들의 표현력을 불어넣었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오케스트라와 성악가간의 호흡과 사운드 밸런스가 적절했으며, 안정감 있는 연출, 과하지도 모자람도 없는 안무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고전이라 부르지만 100년이 훌쩍 넘은 옛날 드라마와의 시간차를 좁혀 재구성에 노력과 고민한 흔적이 농후했다.
오페라 카르멘은 스페인의 이국적 열정과 프랑스의 감수성이 스며들어 연극과 음악이 잘 녹아든 비제의 천재성을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다. 사실주의적 드라마의 요소가 음악과 균형을 갖춘 인생 오페라를 만나게 한 ‘부산 오페라 Week’를 진행한 (재)부산문화재단과 솔 오페라단에게 감사를 표한다. 단, 프랑스 오페라라는 점에서 합창단이나 일부 가수들의 프랑스어 딕션과 뉘앙스 전달이 부족하여 아쉬움을 남기지만 이탈리아 오페라에 집중되어 있는 부산 오페라계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감염병의 위험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고 있음을 확인케 했고 순수예술과 오페라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사랑을 보인 전 출연자들과 제작진, 시민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