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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Feb 23. 2024

라깡과 칸트의 공통점?

지바 마사야/현대사상입문/아르테

이 책을 2회독을 해봤는데,

역시 책은 여러번 읽어야 안보이는 것이 보인다.

처음에는 대충 읽었었는지 

2회독 째에 들어서야 인상깊게 다가온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라깡을 소개하는 파트에서 칸트와의 공통점을 소개한 부분이다.


'라깡은 크게 세 영역에서 정신을 파악합니다. 첫 번째인 상상계는 이미지의 영역, 두 번째인 상징계는 언어의 영역으로, 이 둘이 합쳐져 인식을 성립시킵니다. 사물이 이미지로서 지각되고(시청각적으로, 또 촉각적으로) 그것이 언어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를 인식이라고 부르죠. 세번째인 현실계는 이미지로도 언어로도 파악할 수 없는, 즉 인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영역입니다. 눈치챘겠지만 이 구별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슷한 게 아닐까요?? 나중에 부정신학 비판에서 설명하겠지만, 사실 라캉의 이론은 칸트OS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계->감성, 상징계->오성, 현실계-> 물자체)'


오, 흥미로운 부분이다. 

정신분석학의 라깡을 이해할 때, 상상계-상징계-현실계(실재계)의 3단계가 중요한데 

이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구조와 연결한 셈이다. 

라깡의 상상계는 칸트의 감성

라깡의 상징계는 칸트의 오성

라깡의 현실계(실재계)는 칸트의 물자체.


참고로 칸트의 감성과 오성이 뭐냐면

예를들어 내가 눈 앞의 아이스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컵을 보고 있다고 하자,

칸트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단계별로 쪼개서 설명을 한다. 

먼저 내 시각으로 컵을 지각하게 되면 '투명색, 빨간색, 둥근 윗부분, 짙은 갈색, 액체,,,,' 등의 파편화된 정보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즉 단번에 저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어있는 테이크아웃컵'이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감각에 의한 정보, 즉 데이터가 읽혀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감성'이라고 칸트는 규정하고 있는 것이고, 

그럼 '오성'은 뭔가? 바로 수용된 데이터를 하나로 조합하는 능력이다. 투명하고 플락스틱 재질의 저 모양은 테이크아웃 컵이고, 그 안의 물질은 색과 알갱이를 보건데 얼음과 커피이고, 길쭉한 검은 색 모양은 빨대... 뭐 이런식이 아닐까. 결국 감성은 데이터를 지각하고, 오성은 이를 종합하여 개념을 도출한다. 

이를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선험적 감성형식'과 '선험적 지성(오성)형식'이라고 한다. 

사실 나도 '순수이성비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 더 설명하면 할수록 틀린 지식만을 전달할 수 있어서 최대한 잡담은 줄여야 한다. 

그럼 '물자체'는 무엇인가???

 근대철학에 기여하는 칸트철학의 가장 큰 특이점이 뭐냐면 바로 '물자체'다. 즉 칸트 이전의 근대철학자들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가 정말로 실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고민해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주 착각과 오류에 빠지니까. 그래서.

 [현재 눈에 보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 [실재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 두 개가 일치해야만 인간의 지식이 명확하고, 절대적 진리도 절대신(하나님)의 도움없이 스스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명확히 그어버린다. 

'아니, 이제 더이상 소모적 논쟁은 하지 말자. 인간이 인식하는 저 물체가 정말 인간 인식과 상관없이도 실제로 똑같이 그대로 존재하는지 확인할 길은 결단코 없어. 단! 우리 눈에 비치는 저 물질 그자체는 분명 있기는 할거야. ' 이런 식이다. 즉 (사)물차체는 분명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그저 인간에게 투영된 이미지를 현상이라고 부르고, 물자체는 인간 능력 밖이니 앞으로 우리의 노력은 불가능한 대상에 두지 말고, 우리 인간내면에 왜 그렇게 인식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에 집중하자는 것이 칸트의 새로운 연구발상이었던 것이다. 즉 그동안의 근대철학은 진리는 사물자체를 제대로 파악할 때 가능하다는 희망이었다면, 칸트는 그 희망은 버리고, 현실적으로 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인식하는지, 즉 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인식하는지 인간 내면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곧 진리탐구라고 재정의를 한 셈이다. 

어찌보면 신이라는 존재도 분명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인식할 방법은 없다. 즉 신을 증명하기 위한 논쟁도 부질없다. 어디에서? 이성의 영역에서! 하지만 칸트는 윤리의 영역,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절대적 신의 필요를 요청한다. 칸트철학의 매력이 이런거다. 


여튼, 이제 라깡으로 가보자.


라깡은 인간 정신의 발달단계를 상상계->상징계->현실계로 두는데,

어린 아기가 태어나서 보는 세계가 바로 상상, 이미지의 세계라고 본다. 사실 아기가 엄마와 10개월간 함께 있다가 나눠진 상황이니 엄마와 자신을 구분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 있다. 아기는 엄마와 자신을 구분하기도 힘들고, 세상 또한 자신과 떨어져 구분되고 규정되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  마치 칸트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감성형식을 두고, 눈 앞에 쏟아지는 정보, 데이터를 마구 수합하되 개념화되지 않고 뒤엉켜있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이 책의 저자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상징계는 바로 언어의 세계다. 아이는 부모에게 언어를 배우면서 세계를 배운다. 엄마,아빠,그리고 안돼, 지지, 위험해, 등등 언어를 통해서 구분을 짓게 된다. 언어를 모르던 세상과 언어가 개입된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라깡은 상징계를 언어로 시작해 법,질서,사회를 구성한다. 즉 사회가 형성되고 질서와 법체계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언어에 의한 것이고, 이것이 상징계라고 보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칸트의 오성(지성)이 바로 이와 연결된다. 선험적 지성형식이란 범주의 능력인데, 우리가 범주화를 통해서 개념을 구성할 수 있는 셈이다. 칸트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형식 안에 들어오고 정리된 대상의 다양한 데이터들을(이를 질료라고도 표현하더라) 범주라는 형식안에서 분류하여 개념화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바로 감성과 지성의 종합때문인데, 라깡 또한 상상계와 상징계의 작용을 거쳐서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런데 라깡의 현실계(실재계)는 무엇인가. 이미지(상상)와 언어(상징)에 의해 인식이 성립되어 의미가 발생하지만 그 의미화 전에  거기에 있을 뿐인 것! 그게 현실계이다. 즉 현실계는 직접 마주할 수 없는 무엇이고, 성장하기 전의 원초적인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다양한 자극, 어머니의 변덕에 휘둘리고 불안하던 때, 불안하면서도 느껴지는 고통적인 쾌감의 때라고 볼 수 있다. 인식의 맞은 편에 있는 무언가이고, 인간이 욕망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그 무엇을 '대상a'라고 라깡은 지칭하는데 바로 이미지도, 언어도 할 수 없는 '말하기 어려운 저것'으로서의 현실계이다. 문제는 인간이란 바로 이 현실계를 잃어버렸다는 것. 인식이 성립되어 가면서 필연적으로 묻혀지고, 원초적인 만족은 억압된다. 사실 이렇게 쓰면서도 어렴풋이 잡히는 것이지, 수학처럼 명확하게 떨어지고, 논리학처럼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여튼! 그래서 칸트의 물자체와 또 비슷한 구조인 것도 사실이다. 칸트 역시 분명 실체이지만 인간이 지금으로써는 전혀 인식할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그것이니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의 위치가 라깡의 현실계(실재계)와 비슷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보면 칸트에 대한 선입견은 

근대철학의 해결사로써 딱딱한 이성 철학자로 보기 쉽상인데,

물자체를 전제함으로써, 모순적인듯 하면서도, 신비적인 측면이 분명 있는 것이다. 

있기는 한데, 알 수는 없는 그것. 

그런 부분이 정신분석의 라깡의 도식과 맞물린다는 점을 

이 책의 저자가 '그렇지 않냐'고 발칙하게 내뱉을 때 짜릿함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근데 나 지금 이 글 왜 쓰고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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