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개의 감정단어, 얼마나 쓰고 있을까?
한동안 저는 나이를 먹는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30대 중반이 들어서면서 친구들이 나이에 대한 압박을 느꼈고, 피부과, 에스테틱 등을 다니며 외모를 가꾸거나 운동을 시작해 신체의 노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노력했으니깐요.
그즈음에, 저는 엄마와 화해를 했습니다.
독립을 하고, 물리적 거리가 생겼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니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엄마의 나이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 나이대 엄마는 N살의 나를 키우고 있었네' 이런 식으로 말이죠. 생각보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오빠와 저를 키웠습니다. 아빠는 사업을 해서 주말에도 출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
진짜 '독박육아'를 한 것이죠.
엄마를 향한 크고 작은 서운함이 쌓여서인지 저는 성인이 되고서도 한참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이런 감정이 없으면 너무 좋을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 불가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가 나에게 뭘 묻거나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의견을 내면 짜증부터 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명백히 대화가 아니었어요.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무안을 주지만 결국엔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저에게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반복했던 것 같아요.
혼자 생각할 시간이 길어지면서, 본가에 가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엄마는 마치 엄청 먼 타지에 사는 딸을 대하듯 꼭 묻곤 합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엄마가 해줄게"
그러면 내가 본가에 도착할 무렵 주방에서 정신없이 음식을 차리고 있는 엄마가 보입니다. 맛있게 다 먹고 나서 과일을 챙겨주는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과거의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땐 그랬지, 보다는 '그때 왜 그랬어?'라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습니다. 제대로 방송을 보지 않았지만 엄마는 효리언니의 어머니처럼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뺌했습니다. 좋은 것만 기억해야지 왜 나쁜 것만 기억해서 엄마를 혼내냐는 듯했습니다.
엄마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꿔 말했습니다.
"지금 내 나이 때 엄마를 생각해 봤어. 결과가 뭐가 됐든 난 엄마, 아빠가 우리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열심히 살았을 거라 생각해. 그러다 보니 놓친 것들이 있던 거고, 나는 그때 그런 서운함 감정을 느꼈던 거지"
그다음부터 본가에 갈 때면 과거의 이야기는 또다시 언급됐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제 입이 아닌 엄마 입을 통해서 말이죠.
"너네가 어렸을 때 썼던 일기장을 심심할 때마다 꺼내 보는데, 어쩜 그렇게 실감 나게 썼는지. 엄마가 몰랐던 게 많았던 것 같아. 그때는 너무 바빴어"
어느 날은 나조차도 기억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사과하기도 했고, 내가 느꼈을 감정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엄마와 저의 대화는 그때 비로소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나이를 먹어서 꼭 나쁜 건 아니라고 본격적으로 말하고 다녔습니다. 과거에 영문도 모르고 느꼈던 어떤 감정을 꽤 정제된 단어로, 괜찮은 표현으로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는 것.
갓 태어난 아기는 감정표현이 매우 단조롭습니다. 울거나, 웃거나, 무표정하거나. 지금 어떤 상태인지 표현할 길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말을 시작하게 되면 조금 달라지지만 감정과 상태를 표현하는 건 영 힘듭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이기도 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를 고민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인지한다면, 그걸 표현해도 될지, 말지를 결정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오해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감정을 잘 살피려 노력합니다.
도무지 모르겠으면 '모르겠다'라고 말하며 심란함을 눈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제야 비로소 감정의 본체를 깨닫는 경우가 꽤 많거든요. 이건 나이를 먹어야지만, 아니 확률적으로 (시간과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성숙한 내면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거의 20년 전에 발표했다는 <한국어 감정단어의 목록 작과 차원 탐색>을 뒤늦게 알았지만 어찌나 반갑던지요. 감정단어는 434개입니다.
여전히 카톡에서는 헐, 대박, 짱, 개좋음, 극혐... 정도의 말로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지만 조금 진지하게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무기가 더 풍부해졌기 때문이죠.
찬찬히 살펴보고, 내가 몰랐던 감정이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https://accesson.kr/ksppa/assets/pdf/14556/journal-19-1-109.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