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장 개벽
'돈 돈 돈 돈에 돈돈 악마의 금전
갑순이 하고 갑돌이 하고 둘이 사랑하다
둘이 둘이 사랑하다 못 살겠거든
맑고 푸른 한강 물에 풍덩 빠져서
너는 죽어서 화초가 되고
나는 죽어 훨훨 나는 벌 나비 되어
내년 삼 월 춘삼월에 꽃피고 새가 울 때
당신 품에 안길 것이니 전 줄 아소서..'
노래에 맞추어서 선옥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당시 운동권에서 주로 부르던 노래는 크게 3부류로 나눌 수 있었는데
하나는 미국의 반전 평화 운동가요의 번안으로 히피, 무정부 성향의 낭만적 서정성이 강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이북과 소련의 혁명가요로 비장함과 투쟁성이 강조된 노래로, 때론 활기차고 때로는 우수에 잠긴 노래들
그리고 세 번째는 '노찾사' 등 한국의 문화 창작 운동가가 작곡한 노동가요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 곡은 동요와 민요풍이 섞여있고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와 군무(群舞)를 강조한 안무가 아무래도 평양의 영향을 받은 것 일 텐데 춤추고 노래를 하는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애절한 사랑노래려니 생각하고 남녀가 서로 어울려 율동을 하고 가벼운 신체접촉도 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었다.
그 곡은 여자가 주로 꽃 역할로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났다가를 반복하며 손으로 꽃잎이 피고 지는 것을 형상화 하고 남자는 나비처럼 여자 주변을 맴돌면서 다가갔다가 멀어졌다가 나중에는 손을 잡고 함께 물에 뛰어 드는 시늉을 하는 데 한 소절이 끝나면 다음 파트너와 번갈아 교대를 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선옥의 짝이 된 사람의 낯이 익었다 했더니 그건 바로 명수였다.
'아니 명수가 여길 어떻게?..'
윤주가 깜짝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노래와 춤이 끝났다. 이어서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학생회장을 소개하자 문리대 학생회장이 앞으로 나가서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학생 동지 여러분! 문리대 학생회장 문종석입니다. 단결로 인사올립니다. 투쟁으로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단결!"
그러자 모든 참석자들이 "투쟁!"이라고 외친다. 그 모습이 자못 웅장하다.
"학생 동지 여러분 놀라셨죠? 이번 엠티에 동참해 주신 기룡전자 조합원 동지들 이십니다. 힘찬 박수로 환영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모두들 박수를 치고 명수를 포함한 몇 몇 참석자들이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한다.
"오늘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장을 또 한 번 열어젖히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학생 지식인들은 혁명의 대열에서 주체로 서지 못하고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취급받으며 나쁘게는 개조의 대상 아니면 기껏해야 지원세력 정도로 대접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영광스럽게도 주체사상에서는 노동자 농민과 더불어 학생 지식인을 당당한 혁명의 주체로 일떠 세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에 부응하여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혁명의 그 날까지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이며 그 전초전으로 오늘 학생 노동자 연대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기쁘지 않으십니까? 새 동지들이 든든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투쟁으로 화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투쟁!"
그러자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위로 뻗으며 "투쟁!"이라고 외친다.
학생회장이 발언을 마치자 노조 위원장과 몇 몇 다른 참석자들의 인사말이 이어지고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윤주가 명수에게 다가갔다.
"명수야!"
윤주가 반갑게 명수의 손을 잡았다.
"응, 윤주야! 반갑데이!"
명수도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와! 여서 이렇게 볼 줄은 몰랐다 아이가!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노? 잘 지냈나?"
"응, 보시다시피 이렇게 서울 와서 취직도 하고 노동운동도 하고 그런다. 와 너는 학교 생활 재미있나? 나도 니가 이런 곳에 올 줄은 몰랐다. 나야 이제 사회생활을 하니까 그렇다 치고 너야 한창 공부를 하고 있을 줄 알았지!"
"응, 학교 공부가 영 재미가 없더라. 그라고 너도 느꼈겠지만 우리가 지금 공부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시국이!"
"그래. 암튼 이리 같은 길에서 만나니 더 반갑다, 그지?"
"그럼 그럼. 근데 명자 누나도 잘 있나?"
"응. 명자도 취직했다. 음식점에서 일 한다. 네 동생은?"
"응, 윤미? 가야 이제 고3이라 공부하느라고 정신없지."
"아, 윤미도 착실하니 공부 잘하지?"
"응, 고만 고만하게 해."
"야, 너는 성공했다. 명문대에 다 들어오고!"
"야, 그게 무슨 소용이고? 이 시국에! 너야말로 힘들었을텐데 자리를 잘 잡았다."
"아니야. 비교적 잘 풀렸어. 운이 좋았지. 그냥 들어간 공장인데 노조가 쎄더라고 덕분에 나도 많이 배웠고..."
"그래 다행이다. 이제 자주 만날 수 있겠다."
"그래. 근데 인철이는?"
"응, 인철이도 서울에 왔어."
"와 잘 됐네. 삼총사가 다시 모일 수 있겠네!"
"그러게 잘 됐다. 엠티 끝나면 바로 한 번 만나자."
"응, 그리고 부연이는 잘 지내냐?"
"부연이? 아, 너가 까였다던 걔? 짜식 아직 포기 안했냐?"
"야, 장난치지 말고.."
"나도 몰라."
윤주가 웃으며 명수의 명치를 쿡 찔렀다.
"진짜? 너 거짓말이면 죽인다. 너 알지? 무슨 소식 없어?"
명수가 반 사정을 한다.
윤주는 웃겨죽겠다는 표정으로
"무슨 교대에 특차로 간다고 하던데 어딘지는 말 안 해 주지롱!"
"어디? 서울?"
"너 하는거 봐서 말해줄게!"
"아, 서울이구나. 알았어."
"넌 네 부모님 안부는 안 물어보고 부연이 소식만 묻냐?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야, 됐거든. 아버지 소식은 궁금하지도 않고 엄마 소식은 나도 듣고 있으니까 걱정마라. 그나저나 네 부모님은 잘 계시냐?"
"응, 우리 엄마 아버지야 늘 그렇지 뭐. 잘 지내셔. 암튼 너랑 명자 누나가 서울에서 자리를 잘 잡아서 너네 엄마가 안심을 하시겠다. 안 그래도 너 올라가고 걱정이 많았는데... 너네 아버지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 너무 걱정 마."
부모님 이야기에 명수의 표정이 금새 어두워진다.
"내가 성공해서 반드시 복수하고 말기다."
"야야. 그런 소리 마라. 너네 아버지 엄마도 어쩌면 이 사회 구조의 희생자일수도 있다."
"..." 명수는 말 없이 양미간을 찌푸리고 언짢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벌떡 일어선다.
"야. 다음 일정 시작되나보다. 가자."
두 사람은 나란히 민박 집 마당에 마련된 모임 장소로 걸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