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장 투쟁
다음 날 12시 정각 중앙 도서관 앞에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산했는데 어느새 순식간에 도서관 앞 광장을 가득 채웠다.
미리 모이면 교내에 숨어 있던 사복 경찰들이 눈치를 채고 주동자를 먼저 연행을 하여 집회를 무산시켜 버리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약속 장소에 가는 것도 철저하게 금지가 되어 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근처에 있다가 시간이 되면 잽싸게 모여야 한다.
눈이 익은 사람들도 보이고 세영 선배도 있다. 하지만 누가 스파이이고 누가 조직원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안다고 해도 굳이 서로 아는 체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저 우연히 그 자리에 참석한 학생인 척 행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큰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긴장과 뿌듯함과 두려움에 심장이 뛴다.
"투쟁, 투쟁, 유신 반대, 독재 타도!"
갑자기 도서관 옥상에서 구호 소리와 함께 전단지가 뿌려져서 나뭇잎처럼 광장으로 팔랑팔랑 떨어져 내린다. 모여있던 학생들고 이에 호응하여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네 이름을 남몰래 쓰은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만세 만세 민주주의여 마안세!"
잠시 후 '타다닥' 구두 발 소리를 내며 사복형사들이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 주동 학생을 연행해서 끌고 내려온다.
그러나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대열을 지어 어깨를 걸고 행진을 해서 교문 쪽을 향한다. 전쟁터로 가는 전사들처럼 노래를 부르며 비장하게 나아가는 시위대에 주변에 있던 일반 학생들도 합류를 한다. 이들은 미리 통지를 받지 않은 비운동권 학생들이다. 하지만 여기에 참여하지 않으면 비겁한 사람인 것 같은 분위기와 군중심리로 대열은 갈수록 불어난다.
교문에 가까워지면 어디선가 '펑펑'하는 소리가 나고 최루탄이 날아오고 매캐한 연기에 눈을 뜰 수가 없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고 숨을 쉬면 기도와 허파까지 따갑다. 대열이 흩어지고 이리저리 분산된 사람들이 이제는 보도블록을 깨서 진압경찰에게 던진다.
어떨 때는 대치가 격렬해져서 화염병이 등장하고 분신을 하기도 한다. 흥분한 사람들은 이제 적과 아군으로 나뉘어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전쟁터의 병사들이나 다름이 없어진다.
이렇게 시위가 격화되면 잠시 후에 진압복으로 온 몸을 가린 전투경찰들이 '저벅저벅' 군화 소리를 내며 곤봉을 손에 쥐고 방패를 들고 대열을 지어 들어온다. 하지만 이들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청바지와 청자켓에 오토바이 헬멧을 쓴 백골단이다. 이들은 시위 진압이 목표가 아니라 주동자 검거가 목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때로는 방독면도 벗어던지고 곤봉만을 들고 전경 뒤에서 뛰쳐나와 점 찍어 둔 주동자를 마치 참새를 낚아채는 송골매처럼 날렵하게 달려들어서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질질 끌고 간다. 물론 시위대들도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운동권 핵심 간부들은 이미 뒤로 빠지고 애꿎게 젊은 혈기에 적극 가담을 한 일반 학생들이 걸려들기가 일쑤다.
일단 잡혀가면 그들은 경찰서로 연행이 되었다가 대부분 다음 날 훈방이 되고 조금 낌새가 이상하거나 이전에 한 번 이상 잡혀 온 경력이 있으면 남영동 안기부 분실로 끌려가서 본격적인 취조를 받기도 한다. 1호선 남영역 옆에 창문이 거의 없는 5층 짜리 검은 건물에서 주로 취조와 고문이 일어난다는 것을 왠만한 운동권 학생들은 다 알고 있다. 거기에 한 번 끌려간다는 것은 공포이면서 일종의 훈장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운동권 내에서도 투쟁 경력에 따라 일종의 계급과 서열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정해준다. '강제 입영'은 좀 힘들긴 하지만 향후 인생살이에 큰 손상이 없기에 제일 하급이고 '노동 현장 위장취업'이 그 위, '남영동 고문과 투옥'이 최상급이다. 그 고난과 고초의 강도가 그 후의 활동과 경력에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을 한다. 어떤 현안에 대해 주장을 할 때 상급 고난을 겪은 이가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은 모조건 따르고 복종을 할 수 밖에 없고 물론 그 계급대로 조직의 위계질서가 구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행정기관의 '미숙함' 때문에 잘못된 위계질서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즉, '순진한' 단순 가담자가 억울하게 끌려갔다가 실제로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 것도 불지 못해서 더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러다가 더 악독한 독종으로 분류가 되어서 '지나친' 처분을 받게 되기도 한다.
나중에 남영동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여 민주화에 결정적 공을 세운 박종철 열사나 시위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열사도 사실은 운동권 핵심 간부는 아니었다.
결국 한참 후 세월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고 나서는 ‘어쩌다가’ '강제 입영'을 한 경력이 정치적으로 큰 힘이 되는 정치인도 있게 되고 이 고난 덕분에 ‘세옹지마,’ ‘전화위복’의 인생을 살게 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지내놓고 보면 허탈한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모순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진지했고 비장했다.
심지어 일부 운동권 간부들은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서 사복형사를 감금, 고문을 하기도 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위장과 기만, 불법 자금 조성 등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면서 자신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정의의 편이기 때문에 그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것은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 시켰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과 윤주를 포함한 운동권 하부 조직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자신들이 민주주의와 자주통일과 평화와 평등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신성한 의무감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있었다.
오늘도 시위현장에서 체포를 면하고 가까스로 의대 건물 안으로 몸을 피한 윤주는 화장실에서 눈과 입을 씻고 나오다가 우연히 선옥을 만났다. 선옥도 온 몸이 최류탄 가루로 범벅이 되어 있고 얼굴도 엉망진창 말이 아니다.
"어?" 윤주와 눈이 마주 친 선옥은 반갑게 씨익 웃었다. 비록 몰골은 형편이 없었지만 윤주의 눈에는 선옥이 잔뜩 성장을 한 미스코리아보다도 더 예뻐 보였다.
"형, 언제 나왔어요. 아까 못 봤는데..."
"응, 나는 너 처음부터 봤는데... 잘 싸우더라."
윤주는 대답 대신 계면쩍게 빙그레 웃었다.
"스타디는 잘 되냐? 많이 배웠냐?"
"예. 아직 배울게 많아요."
"그렇겠지. 열심히 해봐. 참 세영 선배가 엠티 이야기 안 해주던?"
"엠티요? 못 들었는데요!"
"아, 이번에 문리대 학생회장에 LM계열이 당선되어서 공개 활동을 많이 하려나 봐. 그래서 엠티도 합동으로 크게 조직을 하고 있어.
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변 확대에는 도움이 되겠지. 다음 주말이니까 그 때 보자."
"예. 그 때 뵈요."
선옥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윤주의 마음에 포근하고 아늑한 샘물이 솟아나서 그날 윤주의 하루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