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1부 8장 새벽

by 이윤수

8 장 새벽


몇 달이 지나 명수와 명자 아니 예린이가 각자의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제대로 일을 하게 되었을 즈음에 윤주와 인철이가 서울로 올라왔다. 윤주는 신촌에 있는 명문 대학교에 합격을 했고 인철이도 4대문 안 성동구에 있는 꽤 괜찮은 대학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대학 분위기는 그들이 꿈꾸었던 그런 낭만적인 상아탑이 아니었다. 허구한 날 정치적 이슈로 데모가 벌어지고 경찰이 최류탄을 쏘면서 교내로 진입하고 학생들이 잡혀가고 휴교령이 내리곤 해서 대학 캠퍼스가 언제나 시끌시끌 했고 강의실이고 학생회관이고 어디도 평온한 곳이 없었으며 학생들과 교수님들도 강의와 수업은 형식적이고 마음은 다들 콩 밭에 가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콩 밭도 모두 사람마다 다르게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는 듯 별로 공감이 가는 구석이 없었다. 기숙사에도 써클룸에도 교정 잔디밭에도 사람들은 바글바글 했지만 모두들 마음을 둘 곳이 없이 외로웠다. 희망을 잃은 청춘들은 허무주의에 빠져서 학교 앞 당구장과 술집에서 시간을 허송세월하고 반면에 도서관은 반짝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대학에 가면 삶의 의미와 밝은 진리의 불빛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던 윤주는 이런 어수선한 대학의 모습에 실망이 커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휴학이나 자퇴를 할까도 생각하다가, 강의실이 아니면 도서관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 보리라 결심하고 매일 틈만 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에 파묻혔다. 다행히 도서관은 항상 조용했고 책들도 다양한 분야에 엄청나게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 부담 때문에 마음껏 읽기 못했던 책들을 윤주는 이제 부담없이 원하는대로 마음껏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도서관에서 다 읽기 못하면 대출을 해서 기숙사로 가져와서 또 읽었다. 책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세계와 지식도 흥미로왔지만 대출 카드에 차곡차곡 적혀가는 도서명들이 하나 씩 늘어날 때마다 마치 저축통장의 예금잔고가 늘어나는 것 처럼 뿌듯하고 기뻤다.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은 졸업 전에 당구 400과 미팅 100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라는데 윤주는 졸업을 하기까지 독서 1천권을 채우리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하긴 당구와 미팅, 흡연, 음주를 하지 않는 윤주로서는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다. 수업도 휴강이 많아서 별로 부담이 없었고 과제도 별로 많지 않았으며 기숙사에 가 봐야 군대처럼 선 후배 따지고 서로 히히덕 거리며 시간이나 죽이는 분위기인데 거기에 휩쓸리고 싶지는 않았고 흥미도 없었다.

그렇게 학기 초가 지나고 난 어느 초여름 날,

어느덧 교정을 환하게 밝히던 봄날 개나리 진달래가 지고,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목련과 벚꽃도 허무하게 다 떨어진 후 이제 바야흐로 물 오른 초록빛 버들잎처럼 왕성한 청춘들의 정열이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듯이 온 캠퍼스에 넘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가오는 축제 준비로 들떠서 정신이 없을 때 그 날도 윤주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보니까 그 넓은 열람실에 사람이라고는 사서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윤주와 또 한 사람의 여학생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 여학생도 항상 도서관에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짙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그 여학생은 대체로 동글동글한 이목구비로 별로 미인 형은 아니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고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윤주는 갑자기 동지라도 만난 듯 반갑고 호기심이 생겼다. 흘끔흘끔 보니까 무슨 고시준비나 학교 공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자기처럼 교양서적으로 자유롭게 독서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건성으로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열람실 마감 시간이 되어서 일어서려니까 그 여학생도 읽던 책을 대출하려고 윤주가 서 있는 창구로 다가왔다.

"바쁘시면 먼저 하세요."

윤주가 기다리는 줄도 없는데 괜한 소리를 하자

"아니요. 괜찮으니 먼저 하세요."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를 한다.

대출처리는 금방 끝났다. 열람실 문을 나서면서 윤주가 여학생의 책을 힐끗 쳐다보고는

"그 책 괜찮아요? 읽을 만 해요?"라고 다시 말을 걸었다.

"아, 이거요?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이거 필독서인데 아직 안 보셨어요?"

"예. 저는 아직..."

윤주는 그동안 자신이 책을 꽤 많이 읽었다고 자부를 했는데 여학생의 그 한 마디에 괜히 자신이 창피해졌다.

"이거,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라는 구절이 유명해요. 꼭 한 번 읽어보세요."

"네. 근데 그런 책들은 어디서 추천을 받나요? 사실 책을 읽으려고 해도 뭘 읽는 게 좋을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신입생?"

"네."

"응. 난 2학년이야. 철학과. 아직 전공도 못 정했겠네?"

"네."

"어디 생각해 본 과는 있어?"

"아니요. 국문과나 영문과 아니면 심리학과.."

"철학과는?"

"글쎄요 그거 하다가는 미아리 가서 점 집 차리거나 밥 굶기 십상이라고 누가 그래서..."

"호호호.." 여학생을 깔깔대며 웃었다.

"미안해요." 윤주가 멋쩍게 사과를 하자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럼 독서클럽이나 이런 거 없이 무작정 책을 읽고 있는거야?"

"네."

"어.. 그럼 안 돼. 책도 제대로 읽어야지. 무작정 아무거나 많이 읽는다고 좋은게 아니야. 길을 잡고 가야지. 내가 독서클럽 하나 소개해 줄까?"

"네. 그럼 좋구요."

" 그럼 내가 하는 독서클럽에 들어와라. 내가 내일 선배에게 물어보고 좋다고 하면 들어오고 아니면 다른 독서 클럽에 소개를 해 줄 수도 있어."

"예, 가능하면 선배가 하는 데로..."

이렇게 말을 해 놓고 윤주는 속 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응, 그래 가능하면 그렇게 하자. 참, 나는 선옥이야. 너는?"

"예. 저는 윤주요 강윤주!"

"그래 윤주. 반갑다."

선옥이 불쑥 손을 내 밀었다.

엉겁결에 손을 맞잡았지만 처음으로 잡아보는 작고 부드러운 여자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느낌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손과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라서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윤주의 이런 모습이 귀여운지 선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책을 든 왼 손으로 윤주의 손등을 한 번 토닥이고는 가만히 손을 뺐다.

"그래 잘 가고 내일 또 올 거지? 열람실에서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선옥과 헤어지고 윤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발이 허공을 걷는 듯 춤을 추는 것만 같았고 무언가 심장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고 신이 났다. 선옥의 모습이 계속 눈에서 아른거리고 선옥이 했던 말이 고장난 테이프처럼 귀에서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기숙사 식당의 저녁밥도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잠을 잘 때도 윤주의 머리 속은 선옥의 생각으로 가득찼다.

꿈도 아마 선옥의 꿈을 꾸었으리라.

다음 날 아침, 강의실에 들어서니 또 칠판에 '휴강'이라고 적혀 있어서 윤주는 바로 열람실로 향했다.

선옥은 없었다. 어제 소개 받은 '역사란 무엇인가?'를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내용이 역시 새로웠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역사는 그냥 객관적인 기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시각과 의도를 가지고 취사선택해서 썼는지 그 저자의 시각을 고려하면서 주관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저자의 설명이 타당하고 윤주로 하여금 또 한 번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 책의 저자와 그 책을 소개해 준 선옥이 고마왔다.

점심때가 지나서 선옥이 열람실로 들어섰다.

"오, 이 책 읽고 있었어?"

선옥이 윤주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벼운 화장품 냄새와 함께 선옥의 숨결이 느껴졌다. 또 윤주의 심장이 요동을 쳤다.

"네."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하자 선옥의 얼굴이 바로 눈 앞에 있다. 거의 코가 닿을 정도였다. 윤주의 볼이 발갛게 달아 올랐다.

"그래, 어때?" 선옥이 옆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예. 엄청 신선해요. 새로운 시각인 것 같아요."

"그래 책을 소개받고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고 나서 감상과 해석을 서로 나누고 비평하는 것도 필요해. 그래야 잘못된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가 있어. 그래서 독서클럽이 필요해."

"그 가입은 어떻게 됐어요?"

"응, 우리 클럽은 인원이 다 찼고 선배의 후배가 하는 독서클럽에 들어가게 해줄거야."

"예. 고마와요."

윤주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선옥과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이 내심 서운했다.

저녁에 윤주는 학교 앞 식당에서 세영을 소개 받았다. 세영은 사회복지학과 3학년으로 또 하나의 독서클럽을 이끌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시절 독서클럽은 대부분 운동권에 속해 있었고 독서는 학생들의 사상교육과 조직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경찰의 검거 때 일망타진을 피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조직 구성원들도 자기가 소속된 5명 이내의 최소집단 이외에는 누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서로 알 수가 없었다. 오직 그룹의 리더만이 그 상위 직계 한 단계 조직과 인접 조직의 리더와 연락과 교류를 할 뿐 그 윗선은 리더도 몰랐고 그 윗선도 또 마찬가지였다. 그러기에 조직 구성원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시작되는 누구로 부터 지시와 통제를 받고 있는 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궁금해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아뭏든, 윤주는 다음 날 부터 세영과 함께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잠자고 수업을 듣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다. 세영이 이끄는 클럽에는 사회복지과 연명과 문헌정보학과 상혁, 그리고 아직 전공을 정하지 않은 1학년 영혜가 있었다. 이제 윤주까지 모두 5명, 정원이 다 찼다.

"오늘은 '전환시대의 논리' 토론이다. 다들 읽고 왔겠지?"

"예!"

후배 4명이 세영의 자취방 어두침침한 전등 아래 앉은뱅이 탁자에 둘러앉아 책을 꺼내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비록 조명은 어두웠지만 세영의 영리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났다.

"그럼 누가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봐."

"예, 기본적으로 베트남전은 베트남 인민이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하기 위한 민족의 독립 전쟁이며 무장투쟁의 일환이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통치 압제를 겪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를 꺾으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원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명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좋아. 아주 좋아. 그런데 왜 한국정부는 그 반대로 미군의 편에 서서 베트남 인민의 독립투쟁에 대립되는 전쟁에 참전하고 베트남 인민을 학살했을까? 윤주가 대답해 봐."

"예, 그건 참전의 대가로 미국이 돈을 주기 때문에.."

윤주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연명이 치고 들어온다.

"아니지,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니지."

"그럼 뭐가 또 있지?"

"그건 남한 정부의 태생부터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연명이 계속 대답을 이어간다.

"파월 한국군은 단순한 용병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 세계전략에 남한 정부가 동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베트남에서 뿐만 아니라 남한 내에서도 해방 이후에 친일 세력들이 미군정을 등에 업고 남한 단독 정부를 구성하여 한반도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방해하고 친일 친미 매판자본의 이익에 충실하고자 노동자 농민을 수탈하고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국주의 지배를 베트남에서도 남한에서도 꼭 같이 반공이라는 논리로 포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아,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지?"

잠시 침묵이 흐르자 세영은 상혁을 지목했다.

"베트남 전은 이미 미국의 패전으로 끝나지 않았나요?"

"아니야. 아직 끝난게 아니야. 한반도가 그대로 분단상태이고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는 여전히 살아있잖아. 조국통일이 되고 모든 피압박 민족과 민중이 해방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게 없어.

중국의 혁명과 베트남의 통일은 그 도도한 역사적 흐름의 시작이자 과정일 뿐이야. 여기서 우리는 세계의 역사와 인민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해.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 볼 사람 없나? 영혜?"

"연대요? 반전운동 같은거요?"

"그렇지. 그것도 좋은 지적이야.

사실 미국의 60년대 반전 운동이 미국 내 여론을 움직여서 결국 미군의 패전을 가져오고 베트남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그렇다면 지금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금은?"

"예. 이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통해서 한반도에 반전과 평화 그리고 민족이 주체가 되는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합니다."

"맞아 맞아.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한미 군사훈련을 반대하는 투쟁을 해야 하겠지?"

"예!"

모두가 결연하게 대답을 했다.

"그럼 다음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한다. 이게 왜 중요한지 아는 사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세영이 말을 이어간다.

"여기서 자기 집이 부자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 아무도 대답이 없다.

"괜찮아, 부자라도 괜찮아. 그런데 부자들은 왜 떵떵거리고 잘 살고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부자들이 잘 났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건 아닙니다." 윤주가 대답했다.

"몰론이지. 그것은 그 사람들 탓이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적인 착취와 수탈 때문이야. 사실 경제학 공부를 더 해야 이 부분은 더 깊이 들어갈 수가 있는데 그건 나중에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 '해전사'를 읽으면 남한에서의 불평등과 부정 부패 정경유착 부조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 자세한 것은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토론을 하기로 하자."

"예. 근데 요즘 책 값이 만만찮게 들어서..."

상혁이 말 끝을 흐렸다.

"아, 그렇겠지! 대부분 금서나 희귀본이라 도서관에도 없고... 그럼 우선 내가 복사본을 좀 구해볼거고 방학 때 알바 보급투쟁도 조직해 보자."

세영이 후배들이 대견한듯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 공부도 했으니 좀 놀아야겠지? 오늘은 민중의 술 막걸리와 김치볶음이다. 좋지?"

세영이 책을 걷고 부엌으로 가서 간단한 요리를 준비한다. 연명이 나가서 거들고 그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담배를 하나 씩 꼬나문다.

윤주는 담배를 안 피우지만 영혜는 익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인다. 여기서는 계급뿐만 아니라 남녀도 평등을 지향하기 때문에 여자 선배 호칭도 누나가 아니라 형으로 한다. 담배와 술, 복장 심지어 엠티 때 잠자리도 모두 같이 하고, 치마를 입거나 어떤 형태로든 남녀 구분을 하는 것은 모두 차별이라고 금기시 한다.

아무려나 아직 1학년인 영혜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꽤나 근사하고 진보적인 것 같아보였다.

"너도 한 대 줄까? 빨아 봐."

자신을 존경하듯이 바라보는 윤주를 놀리듯이 영혜가 불쑥 담배를 내민다. 얼떨결에 담배를 받아 든 윤주가 어색하게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본다. 콜록콜록 기침이 나온다. 모두들 웃는다. 조심스럽게 몇 번을 더 빨아본다. 그냥 견딜 만하다.

"얘, 뽀끔 담배네! 입에만 머금다가 뱉네! 야, 깊숙이 들여 마셨다가 코로 연기가 나와야 제대로 피는 거야."

영혜가 계속 놀린다. 그래도 윤주는 무서워서 입으로만 가볍게 담배를 빨았다. 그래도 담배 연기는 맵고 독했다. 그러는 사이에 음식과 술이 나오고 막걸리를 사발에 부어 건배를 했다.

세영의 선창에 따라 모두 "투쟁!"이라고 외친다.

자주 쓰는 건배 구호는 자주!, 민주!, 통일!, 투쟁!, 해방! 등이었다.

술 기운이 좀 거나하게 오르면 노래를 나지막하지만 힘차게 불렀다.

"누가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내게 투쟁의 길로 가라 하지 않았네.

그러나 꽃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 오르네.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노래들은 대부분 서정적이면서도 비장하고 힘차고 결연한 가사와 곡조였다. 어쩌면 책 열 권을 읽는 것 보다 노래 하나를 같이 부르는 것이 감정적으로 더 다가왔고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흩어지면 죽는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등의 노래는 데모나 파업 현장에서는 그대로 투쟁가와 응원가가 되었기에 교회의 찬송가 마냥 운동권의 필수적인 소품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와 술과 담배와 노래로 결의와 동지애를 다진 후 밤 늦게 각자 집으로 나섰다. 나가기 전에 세영이

"내일 12시, 중앙 도서관 앞!" 이라고 간단히 말했다.

그 때 집회나 중요한 모임이 있으니 각자 개별적으로 참석을 하라는 뜻이다. 거기서는 마주쳐도 서로 아는 체를 하면 안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 일 개인으로 행동을 해야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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