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자신에 대한 허구의 이미지)에게 현재의 순간은 기껏해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쓸모가 있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당신을 데려가는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그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순간으로만 다가오며, 따라서 미래라는 것은 머릿속 하나의 생각 이상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방식이 작용하면 당신은 언제나 어딘가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바쁘며, 결코 ‘지금 이곳에’ 완전히 존재할 수 없다.
현재의 순간이 마치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여겨지고 다루어진다. 이때 초조함, 좌절, 스트레스가 일어나지만, 우리의 문화에서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자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오직 ‘지금'인 삶은 ‘문제'가 되고, 당신은 문제 많은 세상에 살아가게 되며,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행복하거나 만족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삶을 시작할 수 없다. 혹은 그렇게 당신은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문제를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또 다른 문제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을 장애물로 보는 한, 문제에 끝은 있을 수 없다.
- 에크하르트 툴레 저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중
중학교 3학년 쯤이었던 것 같다. 수업시간 중에 문득 내 이상적인 모습 리스트를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현재 내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을 그렸다.
전교 1등 /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 축구를 잘하고 / 노래를 잘부르고 / 키가 몇센티까지 크고 / 체중도 몇키로까지 크고 / 자신감이 있고 / 대학교는 SKY... / 대기업 / 미국 전원주택에 거주하기
이상적인 모습을 세팅해놓자 현상태의 내 모습이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 또는 내 모습이 보잘것 없게 느껴졌기에 이상적인 모습을 세팅한거다. 그 둘은 상호보완적이었다. 내 모습이 보잘 것 없으니 이상적인 나를 더 갈망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갈망하니 내 모습이 더 보잘 것 없어 보였다. 이상적인 모습을 갈망했다.
성적은 그냥저냥에, 옷도 못입고, 약하고 운동도 못하고, 마르고 작고 못생기고 여드름 난 내 모습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내 현재의 모습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여겨졌다. 그럴 때면 이상적인 모습을 적어놓은 글을 보았다. 현재의 나는 미래의 이상적인 모습에 도달해야만 했다. 현재의 나따위 보다 훨싼 중요했다.
현재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시간을 희생했다. 현재 순간의 나는 미래에 쓰여질 나를 위한 제물에 불과했다. 내 현재의 행복을 제물로 바쳤다. 하루 14시간씩 공부하던 재수 시절, 입학하자마자 친구들도 안 만들고 개강 첫날부터 도서관에서 학업을 시작했던 1학년, 군생활 2년 동안 외출 나가면 자기계발을 못한다는 사실이 아까워서 동기들과 외박 한번 나가보지 못하고. 학점 받기위해 40,50시간을 때려 박아서 과제 하나를 처리하기, 높은 연봉을 위해 재미도 흥미도 없는 기업에 취업해서 2년의 시간을 보내는 등. 나는 현재 행복을 희생했다.
24살 중반, 간절히 바라던 일이 내 부족함으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20대 초반부터 몇년간 고단한 실패를 겪으며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나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지난 몇년동안 그 순간을 위해 쌓아왔던 일이 내 실수로 인해 망하다니. 여기에는 자세한 내용을 담지 않았으니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완전히 보잘 것 없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내 모습을 보며 당황할 정도로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나는 자책하며 내 뺨을 매일 강하게 수차례 때렸다.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혼자 소리를 질렀고, 숨이 자주 턱 막혀왔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심하게 났다. 집에 혼자 있으면 잠이라도 들지 않으면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쓰레기야. 내가 완전히 병신이라서 실패한거야. 나는 완전히 개선되어야만해."
스스로가 개선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아래, 강박적으로 이상향을 세팅했다. 현재의 나의 존재를 부정하며 이상향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로 더 강하게 마음먹었다. 나는 현존할 수 없었다. 오로지 미래에 내가 완벽해지는 순간을 위해서 현재는 도구로 사용되어야했다.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으려들었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제하면 계속해서 책을 들었다. 의욕이 떨어지려할 때마다 자기계발서를 보며 강제로 드라이브를 걸었다. 과제 하나에 40시간 매달리며 성적으로 나를 증명하려했다. 외모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운동을 했고, 완벽한 성격의 가면을 썼고, 외모관리에 과하게 집착했다. 자기계발이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그 밑바탕에는 철저한 자기 부정이 깔려있었다. 현재의 내가 죽도록 싫었다. 매일 꿈꿨다. "제발 미래, 그 모습의 내가 되었으면..."
그러나 인간은 미래에 존재할 수 없다. 과거에도 살 수 없다. 우리가 사는 건 오로지 현재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건 현재 뿐이기 때문에, 현재를 부정한다는 건 내 존재를 부정한다는 의미다. 나는 매일 내 존재를 부정해왔다. 내 현재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구로 써왔다. 나는 매일 내 존재를 죽였다.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에 비하면 가치가 없으니 죽어야지. 라며.
24살에 심한 자책과 자기부정으로 인해 신경적인 신체화 증상이 생겼다. 버티고 버티다가 29살에 정신분석 치료 세션을 받았다. 6개월 정도 세션을 거치며, 분석가님에게 들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몸과 정신이 도구가 된 느낌이에요. 존재가 아니라 도구가 된 상태 같은. 내가 설정한 목표를 성취하기위해 그 성취를 이뤄내는 도구로써 기능하는… 도대체 언제 000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되나."
이번에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읽으며 내가 현재를 항상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로지 현재에만 살 수 있다. 현재에 살지 못한다면 미래나 과거에 가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래나 과거에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현재에만 살 수 있기 때문에, 미래나 과거에 가있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처음 이상향을 그린 뒤로 지금까지 15년 동안 존재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죽어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재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챙김 명상을 하며 현재에 머무르고 있지만, 내 생각은 여전히 과거와 미래에 가있다. 현존하기 위해 더 많은 깨달음과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실존주의 철학과 장자, 에크하르트 툴레, 틱낫한 스님의 또 다른 책들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몇가지 깨달음을 얻어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