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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재덕후 공PD Jul 28. 2021

아무로 나미에와 오키나와 –3부-

식민지인 듯 아닌 듯

슈가 로드     


  임진왜란 패전 후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1609년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몇 차례의 권력투쟁에서 승기를 완전히 굳힌 도쿠가와막부가 에도에 굳건히 자리를 잡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일본 본토에서는 침략 및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어떠한 무력투쟁도 용납되지 않는 평화 시기가 도래했다는 말이기도 하죠.      

  에도막부 평화시대는 엉뚱하게도 일본 본토 인근의 소국에게 또 다른 침략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규슈 남단의 사쓰마(현재 가고시마, 미야자키 일부) 번은 일본에서도 손꼽는 무력집단이었죠. 이들은 새로운 영토와 전략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21세기에도 하루가 꼬박 걸리는 뱃길을 따라 오키나와로 쳐들어갑니다.      

 1609년, 사쓰마번의 군대가 류큐(오키나와의 옛 이름)를 침공, 무력으로 복속시켰죠. 류큐는 엄연한 독립왕국이었습니다. 류큐 역사가는 기유년에 왜인들이 일으킨 난이란 뜻으로 기유왜란으로 명명했죠. 

  사쓰마는 당대 어지간한 작은 번의 연간 미곡 산출 규모인 12만 석을 추가로 확보하고, 아마미 군도를 양도받았죠. 이는 현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키나와에 미군이 주둔하고 나하를 비롯한 오키나와 주요 지역이 미군령이 되었지만, 아마미 군도는 일본 정부에 잽싸게 반환되었습니다. 행정구역도 오키나와가 아닌 가고시마현으로 되돌아갔고요. 사쓰마번 시절의 침공으로 아마미 군도의 주민도 오키나와 사람보다 일본 본토인 구성이 더 많기도 했습니다. 


  사쓰마의 류큐 침공과 아마미 군도 할양은, 당대 동아시아의 패권국인 중국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중국의 입김이 그대로 닿는 지역인 오키나와의 종주 패권을 일본과 나누어야 했으니까요.           

  사쓰마의 오키나와 침공의 진짜 목표는 사탕수수였습니다. 설탕은 환금성이 높고 가치도 높은, 당대의 사치품이자 전략물자였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수탈한 설탕은 나가사키항을 거쳐 육로로 가고시마로 에도로 운송되었죠. 


  후일 일본인은 당대의 사치품이자 전략물자인 오키나와 설탕이 이동한 경로를, ‘슈가 로드’라는 낭만적 이름으로 묘사했습니다. 현재도 나가사키에서 사가현으로 이어지는 ‘나가사키 가도’를 ‘슈가 로드’라는 별칭으로 부르고 있죠. 해외에서 전래한 설탕을 나가사키 장인들이 카스텔라 등의 각종 디저트를 만들고 이것이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는 뜻으로요. 

  일본인에게는 달콤한 길로 각인된 슈가 로드는 오키나와 침공의 산물이었습니다.      



식민지인 듯 아닌 듯     


  1879년 메이지 정부는 마침내 류쿠 왕국을 합병합니다. 

  메이지 유신 정부가 수립된 1867년에서 불과 십여 년이 지난 직후였죠. 아직 근대 헌법조차 공포하지 못한 유신 직후 혼란이 그대로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메이지 유신 정부가 해외를 합병한 첫 사례가 오키나와였죠. 

  일본 역사는 이를 ‘류큐 처분’으로 기록합니다. 류큐 왕국을 일본의 옛 행정체계인 번으로 강등시켰죠. 500여 명의 군경을 오키나와로 파견하고, 류쿠 국왕을 도쿄로 압송했습니다. 왕위를 빼앗고 대신에 후작의 작위를 내렸죠.


 수백 년 독립왕국을 유지하며, 중국에 조공을 보내고 조선과 일본에 조공 또는 사신을 보냈던 류큐 왕국은 이렇게 멸망했습니다.      

 수백 년 독립왕국을 유지했다는 뜻은, 행정과 사법체계가 고도화되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지 군사력과 외교력이 약할 뿐이었죠. 

  메이지 정부는 오키나와를 일본의 행정체계에 편입시켰지만, 오키나와 사람의 자치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급 관리에서 말단까지 본토에서 사람들이 건너갔죠. 말만 일본이 되었을 뿐, 오키나와는 사실상 식민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자신들이 아시아 최초로 만들고 있는 국가의 근대화에 자긍심이 높았습니다. 

  제헌의회 등은 한참 뒤에 생겼지만, 번을 철폐하고 도도부현 시스템 등의 근대적 행정체계 도입은 19세기 말 아시아의 관점에서는 눈부신 혁신이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와 같은 행정 개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구관온존책(旧慣温存策)’이라는, 한마디로 왕국시대의 오키나와 행정을 그대로 답습했죠. 오키나와 사람들이 서구적 근대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시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멋대로 판단한 겁니다.      

  ‘인두세’ 같은 대표적 악습도 그대로 이어졌죠. 오키나와가 일본에 합병된 지 십 년도 훌쩍 지난 1895년이 되고서야 오키나와 사람들은 인두세에서 해방됩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이 되었지만, 일본 본토인들이 누리는 권리는 고사하고, 일본 본토라면 절대 없을 조세 악습의 피해에서 10년 넘게 고통당했던 겁니다.      


  이게 진짜 이상하죠. 후일 조선도 대만도 일본에 병합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령 대만, 일본령 조선으로 시작했습니다. 오키나와는 병합과 동시 일본의 행정체계에 편입되었으니,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동으로 일본인의 법적 지위를 받은 거죠. 그런데도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보다 못한 처우를 받았어요. 일본 본토에서 시행된 근대적 정책은 오키나와에서 10년~25년 뒤에나 하나씩 하나씩 도입되었습니다. 심지어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보다 늦게 시행된 근대화 정책도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정부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반감을 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키나와 학(學)     


  역대 오키나와 현지사 중 가장 악명 높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류큐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4대 현지사 나라하라 시게루(奈良原繁)는 정말 악명 높았죠. 


  독재자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히틀러나 스탈린 등의 월드클래스급 독재자가 아니라도, 작은 회사 작은 동네 어느 곳에나 독재자는 나타나죠. ‘류큐 왕’ 나라하라 시게루가 딱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독재자의 통치 유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태연스레 지시하거나, 당연한 일을 태연스레 막는 거죠. 나라하라는 주로 막는 쪽이었습니다.      


  일본인의 억압통치에 맞서는 오키나와 출신의 지사, 당대의 국비유학생인 현비유학생 출신 관료였던 쟈하나 노보루(謝花昇). 

  1899년 오키나와 구락부(沖縄倶楽部)를 설립하고 오키나와의 민권운동과 자치권 및 참정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류큐 왕 나라하라는 눈엣가시인 오키나와 구락부를 해체했습니다. 

  이때 뿌려진 오키나와 자치의 씨앗은 후일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 오키나와 곳곳에서 사회주의 운동가 등의 학생운동가를 많이 배출시켰죠.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일본에서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사이에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사조 운동입니다. 당시 일왕의 연호인 다이쇼와 만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를 결합한 말입니다. 

  당대 동아시아는 국제적으로도 변혁이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1911년 부패하고 무능한 청 왕조 타도를 기치로 내건 신해혁명, 1917 볼셰비키 혁명, 1919년 조선의 3.1 운동까지 인권과 자주의 격동의 시기였죠. 이준익 감독의 2017년 영화 ‘박열’의 배경이 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이를 탄압하기 위해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대항했습니다. 후일 한국의 독재정권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기초로 국가보안법을 만들었고, 아직도 완전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1932년 일본 군부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일본 전 부문이 군부에 의해 완벽히 장악되었죠. 짧은 기간 봄꽃처럼 퍼졌던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발흥과 몰락 기간 동안, 오키나와에서 새로운 문예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본 본토로부터 끔찍한 차별을 당하며, 역사, 민속한, 생활사 전반에서 류큐인의 정체성을 찾는 운동이었죠. 한마디로 ‘오키나와란 무엇인가’ 그리고 ‘오키나와인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인종도 역사도 종교도 삶의 방식도 일본 본토와 다른 오키나와였으니, 오키나와 전반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오키나와 학이란 이름으로 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어쩐지 식민지 조선이 묘하게 겹치지 않나요?     

  오키나와 학이 꽃을 피우기 시작할 때, 진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태평양전쟁으로 극심하게 고통받은 계층은 일본 본토의 서민들이었죠. 식민지 조선인 이상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만성적 물자, 식량부족에 강제 징병까지. 한번 군에 끌려가면 생사를 가늠할 수 없고,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와도 명예로운 죽음을 강제당했죠. 

  전쟁 당시의 본토 서민들은 어쩌면 식민지 조선인보다 더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가장 고통받은 사람은, 본토 서민도 조선인도 아닌 오키나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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