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한 아무로 나미에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恵)는 오키나와 열도의 핵심지역인 나하(那覇) 시에서 1977년 태어났습니다. 당시 일왕은 히로히토, 연호는 쇼와(昭和). 그는 쇼와시대에 태어났죠.
1989년 시작된 헤이세이(平成) 시대를 거쳐 2019년 레이와(令和)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아무로 나미에는 어엿한 쇼와시대에 태어나고 성장해, 헤이세이 최고의 디바로 활동했고, 레이와 시대에 안온한 자연인이자 인플루언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로 나미에의 개인사는 20세기 말 J-POP 전성기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1996년 발표한 두 번째 앨범 ‘SWEET 19 BLUES’의 초도 물량이 무려 300만 장을 기록했습니다. 두 번째 앨번의 초회 판매에서 이미 밀리언셀러를 세 번이나 넘긴 거죠. 이 놀라운 기세로 그해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최연소인 만 19세로 대상을 수상합니다.
이후 명 프로듀서 코무로 테츠야를 만나 승승장구했죠. 2004년 한국 공연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아무로 나미에는 단지 한 명의 인기 있는 아티스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은 물론 철학과 삶의 태도까지 당대 일본인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쳤죠.
그는 만 40세가 되던 2017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 선언과 함께, 데뷔 25주년 기념공연이자 은퇴 기념 공연 「namie amuro 25th ANNIVERSARY LIVE in OKINAWA」를 오키나와에서 개최했습니다.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할 에너지가 충분했던 터라, 그의 팬들의 안타까움은 대단했습니다. 도쿄가 아닌 오키나와에서 열린 공연이었는데도, 무려 5만여 명의 팬이 그를 보기 위해 일본 전국에서 몰려들었죠.
아무로 나미에는 사업수완도 좋았어요. 선한 영향력과 기부는 더 대단했죠. 국내외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2005년 수마트라 지진 당시, 어린이들을 위해 일본 유니세프 협회를 통해 1억을 기부했습니다.
유명해진 이후, 고향 오키나와를 위해 통 큰 기부를 거듭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기부는 계속 이어졌어요. 2018년에도 오키나와의 어린이 빈곤 문제 해소를 위해 설립된 ‘오키나와 어린이 미래 재단’에 2,000만 원을 조용히 기부한 게 밝혀졌습니다.
그의 기부는 조용한 것으로 유명하죠. 거액 기부로도 유명하지만 이미 기부했던 곳에 여러 번 기부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2011 동일본 대지진 때도 적십자사를 통해 5억 이상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정확한 기부 총액은 아무도 모르죠. 자신이 기부한 금액의 일부가 뉴스에 나온 것에 봄을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정말 힘들고 괴로운 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인데, 연예인의 기부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괴롭지만 중요한 뉴스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도 특이한 일이죠. 일본의 연예인 그것도 탑티어급의 연예인은 일체의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종의 사회적 룰이죠. 자신이 속하지 않은 부문의 일은 말하지 않는다는.
아무로 나미에 정도의 셀러브리티가 기부를 하고, 자신의 선행만 집중 보도하는 미디어에 대해 분노했다는 것. 이것도 일본 사회에서는 어엿한 정치적 발언으로 규정됩니다.
일본인이 사랑하는 기부왕, 아무로 나미에는 2021년 7월 일본 정부로부터 기부왕 인증 포장을 받습니다. 감수포장(紺綬褒章;곤쥬호쇼). 훈장보다는 약간 아래 등급의 포장이죠.
이런 사람이니, 2021년 일본 정부로부터 공인받은 기부왕 포장을 받아도 내켜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일본 정부의 발표로 아무로 나미에는 1억 5천만 원 이상의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음.. 그런데 분명 더 했을 거예요.
한해 미뤄진 도쿄 올림픽을 목전에 둔 6월, 일본 정부는 일본인에게 존경과 사랑을 동시에 받는 여러 기부왕에게 훈포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만들고 싶은 ‘따뜻하고 온정이 넘치는 일본’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좋은 행사였겠죠.
가토 가쓰 노부 관방 장관은 7월 14일 기자 회견에서 아무로 나미에에게 “공익을 위해 많은 기부를 했다.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무로 나미에의 반응은 또 어땠을지. 여러 미디어를 뒤져봤지만, 공식적 코멘트는 없었습니다. 도쿄 올림픽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아무로 나미에 정도의 배짱 있는 사람이라도 솔직한 심정을 말하기는 어려웠겠죠.
새로운 세기를 1년 앞둔 1999년.
일왕 즉위 십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황궁 앞 광장에서 개최된 행사가 열렸습니다. 세기말 일본의 대단한 이벤트였죠.
일왕의 존재 이유는 일본 국민의 통합에 있습니다. 일본 평화헌법 제1장에 천황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정의가 있죠.
[일본 헌법 제1장 천황]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
현대의 일왕은 우리 통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사회 전체가 우익에게 점령된 일본의 밸런스를 맞추는 평화의 균형추 역할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현 일왕은 물론 선대 일왕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헌법상 국가 최고 지도자도 국가원수도 아니지만,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왕실의 큰어른이 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은 겁니다.
어이없게도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해야 할 우익’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일왕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일왕은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 때, 임시보호소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이재민의 아픔을 나눈 모습이 대표적이죠.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1995년 한신 대지진 때도 임시보호소를 찾아 슬리퍼도 신지 않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재민과 마주했습니다.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일왕은 일본인의 사랑을 받고 있죠.
아무로 나미에는, 이런 존재가 직접 주관하는 행사에 참석해, 기미가요를 제창하지 않은 겁니다.
기미가요는 국가의 주요 행사와 국제경기의 일본 우승 기념가로 널리 사용되고 있죠.
일본의 법정 국가는 아닙니다만 사실상 국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로 나미에는 왜 일본인이 국가처럼 부르는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한 걸까요?
기마가요 제창 거부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우익은 벌떼처럼 몰려 그를 공격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알려지며, 마치 아무로 나미에를 반일의 아이콘처럼 여기기도 했죠.
일본 우익의 주장입니다.
“아무로 나미에의 개인적 사정이 아니야. 오키나와현의 교육방식이 문제야. 오키나와현은 학생들에게 기미가요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
“아니야. 오키나와현은 기미가요를 가르쳐 주지 않는 것에 더해, 기미가요를 부정적 관점으로 교육해”
한국인의 해석입니다.
“아시아 침략기 일본인이 자랑스럽게 불렀던 국가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은 것은, 그의 높은 역사인식 때문이야”
일본 우익도 한국도 모두 틀렸습니다.
아무로 나미에의 공식 답변은 이렇습니다.
“기미가요를 들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다. 모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부르지 못했다”
이 말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핑계 같습니다.
아무로 나미에라는 오키나와 출신 아티스트가, 일왕 주최 공식행사에서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은 것. 이걸 이해하기 위해선,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인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과 일본인을 뭉뚱그려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본 인구의 절반이 되지 않는 한국인도 다양한 정치, 역사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죠.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오키나와 사람이라는 점. 본토 일본인과 오키나와인의 정체성이 다른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 근현대사에서 오키나와와 오키나와인이 겪은, 끔찍한 고통과 슬픔.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