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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재덕후 공PD Jul 14. 2021

아무로 나미에와 오키나와 –1부-

아무로 나미에,국가포장받다

아무로 나미에국가 포장받다      


  일본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유명한 예술인이 있죠. 

  아무로 나미에가 대표 격입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인 90년대 초중반, 보따리상이나 드물게 일본 출장, 유학을 다녀온 지인들을 통해 한국에 알려진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恵). 

  90년대 일본 대중음악계는 빛나는 별들로 그야말로 찬란했습니다. 

  X-재팬, 자드 그리고 아무로 나미에. 

출처 : 오키나와 타임스 https://nordot.app/787573931080990720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2021년 7월 13일, 일본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았습니다. 



紺綬褒章(곤쥬호쇼). 

우리 발음으로는 ‘감수포장’. 

훈장보다는 아래 등급의 휘장입니다.      

 ‘곤쥬호소’는1918년에 제정된 유서 깊은 포상입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한 사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포상이죠. 

최소 5,000만 원 이상 기부해야 수상 자격이 주어집니다. 

 

  아무로 나미에는 2018년, 30여 년 가까운 연예계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공식 은퇴 후에도 크고 작은 선행을 했던 모양입니다. 역시 클래스가 달라요.


  그런데, 아무로 나미에가 일본 정부에게 훈장을 받았다고?      


  ‘응? 아무로 나미에는 반정부 인사는 아니지만, 어떻게 봐도 야마토 나데시코는 아닌데?’     


  야마토 나테시코(大和撫子)는 일본의 전형적 숙녀상입니다. 

  우리 문화와 말로 굳이 옮기면 ‘양가집 규슈’ 또는 ‘현모양처가 될 상이로다’ 정도의 느낌이겠죠. 야마토(大和)는 고대 일본을 뜻하고, 나데시코(撫子)는 동북아시아에서 흔히 피는 들꽃인 술패랭이꽃입니다. 

  물론, 21세기 일본에서 ‘야마토 나데시코’ 어쩌고 저쩌고를 읊으면 아주 훌륭한 꼰대 취급을 받을 겁니다. 딱 우리말의 “라떼” 느낌 물씬인 거죠.      

  아무로 나미에는 어떻게든 야마토 나데시코가 아닙니다. 

  아무로 나미에가 20세기 요조숙녀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에요. 야마토 나데시코는 거의 순혈 일본인 여성만을 의미합니다.      


  응? 아무로 나미에는 일본인인데?      


  국적은 일본이 맞죠. 하지만 아무로 나미에는 오키나와인입니다. 



.. 오키나와      


  오키나와 출신의 아무로 나미에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죠.(기미가요는 법정 국가는 아닙니다. 음.. 그러고 보니 우리 애국가도 법정 국가는 아니죠) 


  오키나와는 예전부터 일본이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류쿠국이라는 독립 왕조로 수백 년을 지속했죠. 청나라와 동남아시아, 일본의 사이에서 중개무역으로 나름 존재감을 가졌던 독립왕국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쓰시마처럼 조선에 사신을 보내 일본의 침략 위험을 알려주기도 했었죠. 

  고려 중기 몽골의 침략기 때도 한반도와 오키나와의 인연은 계속되었습니다. 

  원나라 대군의 침공 때 삼별초는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차례차례 원군에게 밀려났죠. 1,273년 최후의 침공으로 제주도까지 함락당했을 때, 살아남은 삼별초 몇몇이 류큐로 피난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실제 류쿠 왕궁 유적지에서 고려의 귀면와(귀신 문양이 장식된 기와)와 연화무늬 수막새(불교국가 고려를 상징하는 연꽃문양의 장식)가 발견되기도 했고요. 


  임진왜란 이후, 규슈의 사쓰마(현재 가고시마, 미야자키) 번에게 무력으로 오키와 일부 지역이 복속되었습니다. 사쓰마는 오키나와의 사탕수수를 수입(사실상 수탈)하며 부를 축적했었죠. 

  사쓰마는 이때 축적한 부를 이용해, 개화기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근대식 범선과 화포를 사들이며 군비증강을 했었죠. 사쓰마와 죠슈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점점 일본의 지배력이 강해지던 중,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키나와는 일본제국에 병합됩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이 되었지만, 일본 본토인에게 식민지 조선사람들처럼 눈에 띄는 차별을 받았죠.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한국처럼 미군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점령군이었던 미군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태평양전쟁 최후의 전투인 오키나와 전선에서, 오키나와 민간인까지 옥쇄를 주장하던 구일본 제국군에게 질린 탓이 컸죠. 

  이때, 일부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이 상륙하면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살해당할 것이라는 일본 대본영의 흑색선전에 속아, 안타깝지만 헛되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구일본 제국군의 옥쇄 강요로 집단자결을 강요당하거나, 미군과의 전투 당시 인간방패로 사용하는 등의 전쟁범죄행위로 사망한 숫자가 더 많습니다. 

  자료마다 다르지만 당시 오키나와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10만이 넘는 오키나와 사람이 학살당했다는 게 정설입니다.      


  오키나와는 한국보다 조금 먼저 미군정의 지배하에 놓였습니다. 

  오키나와는 몇십 년 동안 국제법상으로 일본이 아니었던 거죠. 미군정 통치 기간 때,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를 방문하려면 당! 연! 히! 여권이 필요했습니다. 


  1950년이 되면, 미군정은 미국인이 주축이 된 미국민정부를 수립했고, 미국민정부는 무려 25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미국은 1972년 오키나와 시민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했습니다. 물론 미군은 그대로 주둔했고요. 미군의 동아시아 기지 중, 오키나와의 공군과 해병대 기지는 한반도 주둔 기지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기지였습니다. 


  미군에게 권력을 이양받은 오키나와 시민정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독립국이었던 류쿠왕국의 전통을 복원해 완전한 독립국으로 가자 

     VS 이미 최고 수준의 선진국으로 진입한 일본의 도도부현으로 편입되는 것이 옳다 


  이렇게 국론이 갈라졌습니다. 

  당연히 오키나와 주민 투표로 오키나와의 미래가 결정되어야 마땅했죠.      

  결과는 냉혹했습니다. 

  닉슨 미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의 회담 이후, 오키나와는 일본에게 반환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죠.      

  1972년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이 되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스스로를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 사람으로 생각하는 비율은 여전히 높습니다. 

  오키나와 독립에는 찬성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오키나와의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겁니다. 

  2007년 오키나와 지역 언론인 루큐신포(琉球新報)에 의하면, 오키나와 독립에 찬성하는 비율은 20%에 머물지만, 자신을 일본인이 아니라 오키나와인으로 인식하는 비율은 41%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41%에 아무로 나미에가 속해있던 거죠. 

  그가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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