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메유리 학도대 참사
오키나와는 일본 최대의 미군기지가 있는 곳입니다. 사실 일본 최대가 아니라,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를 제외하면 동아시아 최대입니다. 현재도 가데나에 최강의 항공전력을 자랑하는 제18항공단과 후텐마에 36 해병 비행단 등이 여전히 위용을 뽐내고 있죠. 그 밖에도 많은 수의 주일미군이 오키나와 열도 각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혼슈의 가나가와현의 아쓰기 기지나 이와쿠니 기지도 대단한 규모지만, 오키나와의 후텐마는 역사적으로도 군사적 중요도를 고려해도 일본 최고 최강의 미군기지입니다.
오키나와는 미군 해외파병의 훈련기지 역할도 합니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는 병력의 투입 직전에 필요한 훈련기지 역할도 하는 거죠. 오키나와에서 최근까지 미군에 의한 각종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쟁서 복귀한 미군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재정비를 하는 곳도 오키나와거든요. 긴장이 풀린 복귀 미군의 일탈이 오키나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전략적으로 크게 주목받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중국 본토와 동남아로 진출하기 좋은 전략적 위치로는 대만이 있었고, 미군과 영국군도 필리핀, 미얀마, 싱가포르의 사수가 오키나와 침공보다 훨씬 중요했죠.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전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오키나와는 다시 주목받는 곳이 되었죠. 일본군은 오키나와를 남양 전선으로 향하는 병력의 집결지와 육해군의 병참 기지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행동은 미군이 오키나와를 주목하게 만들었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오키나와 점령은 필수 불가결한 무엇이 되고 말았습니다.
2차 대전 최대이자 최악의 공방전은 당연코 스탈린그라드 전투일 겁니다. 당시 독일군의 항공 폭격과 육군의 정밀한 포격을 소련군은 ‘강철의 비’라 묘사했죠. 하늘에서 강철로 된 비가 내려 대지의 모든 것과 사람을 산산조각 냈던 겁니다.
오키나와는 미군과 일본군의 태평양전쟁 최대의 격전지였습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 남짓한 기간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일본 영토에 해당하는 오키나와를 빼앗긴다면, 지척에 위치한 본토 규슈와 혼슈로의 미군 상륙을 눈앞에 둔 꼴이었습니다. 미군으로서는 이미 승기가 넘어온 전쟁에서, 단기간에 오키나와 점령에 성공한다면 사실상 종전이 가능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죠.
당시는 이미 일본의 주요 전략거점인 괌과 사이판 그리고 필리핀까지 미군에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괌과 사이판에서 출격한 폭격기가 도쿄 한복판에 대규모 공습을 벌이기도 했고요.
1944년 가을부터 미군은 오키나와 최대의 군항인 나하항과 오키나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일본 공군 기지에 대규모 공습을 했습니다. 오키나와 진공이 시작된 1945년 6월 이전에, 오키나와를 지키고 있던 일본 해군과 공군 전력이 상당 부분 무력화된 거죠.
그런데도 미군은 손쉬운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미군은 이오지마 등의 격전지에서 일본군이 일체의 투항 없는 지독하고 끔찍한 저항을 경험했으니까요. 미군은 전쟁이 무한정 길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유럽 전선이 이미 연합군의 승리로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일본을 상대로 더 이상 미군의 희생이 대규모로 발생하는 것이 두려웠던 겁니다.
미군은 상륙병력 투입 전 대규모 항공 폭격과 함상 포격을 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미군의 폭격과 포격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철의 폭풍’이라고 불렀죠.
근대국가에서 군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함이죠.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군은 정반대였습니다. 군대의 병력과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국민을 동원하고 희생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었죠.
미군 침공이 뚜렷해진 시점부터,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을 보호하는 데 관심 없었습니다. 웬만한 남성은 죄다 징집하거나 노역으로 부렸고 어린 남학생들은 데려다 군인이나 보조병 역할을 수행하게 했습니다. 이 정도가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 중 가장 인도적인(?) 수준이죠.
일본군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을 인간방패로 썼습니다. 수사적인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의 ‘인간 방패’입니다. 미군이 진공 하면 민간인을 미군 앞으로 보내는 거죠. 처음에 미군은, 민간인이 확실해 보이는 오키나와 양민을 보고 사격을 멈춥니다. 그러면 양민 뒤에 숨어있던 일본군이 미군을 공격했죠. 양 군대 사이에 낀 민간인은 어떻게든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도망치면 어땠을까 생각할 수도 있죠. 일본군은 도망치려는 민간인을 잡아, 비국민, 비애국자로 몰아 죽였습니다.
일본군의 선전선동도 악랄하기 짝이 없었어요.
“미군이 상륙하면 군인 민간인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인다”
“부녀자는 폭행당할 것이고, 남자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잔인하게 죽는다”
지독한 세뇌는 오키나와 민간인들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일본군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일본군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자결을 강요했죠. 가족별로 마을별로 십수 명씩 그룹을 짓고, 수류탄을 나눠줬습니다. 그렇게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이 사실상 타의에 의해 살해당했죠. 이게 그 악명 높은 오키나와 민간인 옥쇄입니다.
당시 오키나와 전체 인구는 4~50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만 15만입니다. 전체 인구의 1/3 이상이 석 달 남짓한 오키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겁니다. 전 세계 전쟁사 단위 전투에서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이 더 큰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만, 오키나와 전투처럼 단기간에 민간인 희생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사례는 찾기 힘들죠.
당시 미군은 15,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일본군은 8만여 명이 전사하는 동안, 오키나와 민간인은 15만 명 이상의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민간인을 희생해서 군대를 유지해야 한다면, 대체 군대가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키나와 민간인 희생, 특히 강요된 자결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확실히 밝혀진 희생자는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명이 넘을 것으로 알려졌죠. 그중에서도 그나마 잘 알려진 끔찍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944년 12월. 일본군은 오키나와 사범학교의 여학생과 오키나와 현립 제1 고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부대를 창설합니다. 일본군의 간호를 주 임무로 만든, 육군 소속의 이른바 여학생 학도대였습니다. 성인 교사는 물론 미성년인 여학생들도 간호 요원과 군무원으로 강제 징집당한 거죠. 이들의 부대명이 히메유리 학도대(ひめゆり学徒隊)였습니다.
1945년 3월.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이 임박한 시점.
오키나와 사범학교와 현립 제1 고등학교의 여학생 200여 명과 인솔교사 18명 오키나와 육군 병원에서 간호 요원과 군무원으로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육군은 징집 당시 “1주일만 복무하면 전투는 승리로 끝날 것이고, 간호 복무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했죠. 실제 오키나와 전투는 세 달여를 끌었고, 200여 명이 넘는 학도대 중 절반 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투가 격화되며 이들은 나하 육군 병원 방공호로 먼저 피신합니다. 그 후 일본군 총사령부가 함락되며 패잔병과 피난민과 뒤섞여 섬의 남쪽으로 피난을 시작했죠. 그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과 포격으로 사망하기도, 이동과 피난 중 실족으로, 질병에 걸려, 또 낙오되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일본 육군 사령부는 사실상 해체, 일본 해군 역시 무너진 지휘체계를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방공호에서 전멸합니다. 그때까지 생존한 히메유리 학도대도 미군에 포위당한 채 방공호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죠.
6월 18일이 되자, 패잔군 지휘부는 히메유리 학도대에 어이없는 명령을 내립니다.
“히메유리 학도대는 해산하라!”
걸음이 느린 데다 비무장인 민간인 부대, 히메유리 학도대. 이들을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그대로 버린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더 끔찍한 일은 부대 해산 명령 후, 학도대 일부에게 집단 자결을 명령해 1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군에 의해 포로로 수용되기까지 히메유리 학도대는 일주일 이상을 미군과 일본군의 오인사격, 폭격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강요된 극단적 선택 종용에 의해 죽어갔습니다. 이때 입은 부상과 정신적 후유증으로 미군 포로수용소에 옮겨지고도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학생들이 있었죠.
더욱 황당한 건, 이 사실이 미담이 되었단 거죠. 전쟁 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히메유리 학도대의 넋을 기리기 위해 히메유리 탑이 건립된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죠. 그런데 이들을 전범을 기리는 상징과도 같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일본 정부에 의하면 히메유리 학도대는 강제징집이 아닌 자원입대라고 합니다.
히메유리 학도대 참사는 통제받지 않는 군대가 극한에 몰리는 경우, 자국민을 어떻게 취급하는가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죠.
히메유리 학도대의 연령 구성은 15세~19세 청소년이 절대다수였습니다. 민간인 희생만으로도 끔찍한데 미성년인 절대다수의 희생은 차마 입에 담기도 참혹하죠.
의문이 듭니다. 대체 일본 군부는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패전이 확실한 전투 상황에서 병력 보존을 위해 몇 남지도 않은 무기 보존을 위해, 민간인을 서슴없이 사지로 내몰았던 심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오키나와는 표면적으로 일본의 영토였지만, 일본인에게는 단순한 식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미군의 진짜 일본 본토 상륙이 확실시되던 시점, 일본 군부는 미군에게 극악한 쇼를 보여주고 싶었죠. 일본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오키나와의 미군 점령도 이토록 참혹했으니, 미군이 일본 본토로 진공 하려면 대단한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담은 쇼.
정리하자면 전쟁 종료 막후 협상에서, 일본 측의 최후 협박용으로 오키나와와 오키나와 사람을 희생시킨 겁니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면 오키나와보다 더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결국, 미국은 미군의 희생을 막기 위해 핵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응했죠.
오키나와 전투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미국은 물론 일본 본토에 대한 나쁜 기억과 정서를 지니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수만 가지일 겁니다. 정치인의 탐욕, 내부 갈등의 해소, 자원 부족 타개, 역사적 대립, 강성한 군사력을 주체 못 한 침공 등등.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죠.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은 물론 죄 없는 민간인이 너무도 많이 죽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