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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걍 Apr 17. 2020

가방을 만들면 합격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요

코바늘 배우는 백수의 이야기

내 오래된 취미 중 하나는 바늘과 실로 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바느질과 자수, 대바늘 뜨개질까지 옛적에 이미 섭렵하고서, 최근에는 코바늘을 배우기 시작했다. 코바늘을 처음 배우면 코스터와 수세미만 주구장창 만들게 된다. 기본적인 뜨개 방식을 익히기 위해 가장 쉬운 것들을 만들며 연습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파란색 수세미 실로 동그란 수세미를 만들었다. 코스터와 달리 수세미는 실수를 해서 못난이가 되어도 티가 잘 안 나고 어차피 쓰다 보면 망가지기 때문에 부담감이 적다.


이렇게 눈이 빠져라 수세미를 뜨다 보니 한참 꽃 자수를 놓던 때가 생각났다. 가방에 수틀을 넣어 다니며 시간만 나면 장소에 상관없이 주구장창 꽃을 수놓았다. 종종 바늘과 실을 밥상머리에 끌어들일 때도 있었다. 당시 남자 친구와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수틀을 꺼내며 슬쩍 얼굴을 쳐다보면 그는 괜찮다는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내가 수놓는 것을 흐뭇하게 쳐다보곤 했다. 여성적인 모습이 예쁘대나.


하지만 내가 여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시간만 나면 자수를 놓던 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취업 활동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던 중이었다. 매일같이 자기소개서를 쓰고 토익 공부를 했지만 돌아오는 건 ‘아쉽게도...’ 나 ‘죄송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메시지였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는데 모든 게 고까웠다. 안부를 묻는 친구들이 미웠고 면접 결과를 물어보는 엄마랑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나한테 들어간 돈이 얼만데...’ 투자 대비 가성비가 떨어지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런 취업준비생이 거창하고 돈 드는 취미는 할 수 없으니 가볍게 시작한 취미가 자수였다. 유튜브를 보며 기본 스티치와 조금 어려운 스티치를 어렵사리 배운 후, 가방을 만들기 위해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수만큼은 바늘이 가는 길을 따라 수놓아졌다. 꽃을 놓으면 꽃이 되었고 잎을 놓으면 잎이 되었다. 당장 내일의 내 모습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내 앞의 수틀 안에 꽃밭 하나는 놓을 수 있었다.


자수가 놓인 가방에 끈을 달다가 합격 전화를 받았다. 자수 놓는 나를 예쁘다며 쳐다보던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부모님과 동생, 친구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고 난 뒤, 메일함을 열어 인사담당자가 보낸 ‘첫 출근날 들고 와야 하는 서류 리스트’를 확인했다. 그 뒤로 필요한 서류를 발급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회사에서 입을 옷을 마련하며 첫 출근날까지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박음질을 반만 한 가방은 머릿속에서 잊혔다. 이제 나는 내일의 내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다 이렇게 갑자기 또 새로운 뜨개 방식을 배우게 된 건, 요즘의 내가 다시 번번이 취업에서 고배를 마시는 시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퇴사 후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더니 코로나가 터져서 반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채용 공고는 적은데 지원자는 많고, 애매한 경력의 나는 별로 매력적인 지원자가 아니었다.


눈 앞에 높인 자기소개서로는 내 미래를 그릴 수 없는데, 바늘 하나로는 수세미를 만들 수 있다. 어렵기로서는 코바늘 배우는 것도 어렵고 이력서를 깔쌈-하게 쓰는 것도 어려운데, 전자는 수세미도 주고 코스터도 주는 것에 비해 후자는 ‘아쉽게도..’ 나 ‘죄송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문자만 준다. 또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바늘과 실을 사용하는 일뿐이다.


가방을 만들다 전화를 받았던 날처럼, 열심히 코바늘을 배워 뜨개 가방을 만들다 보면 합격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오늘도 내 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내 손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지는 수세미만 주구장창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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