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세의 달인
거절을 할 때 최대한 상대방의 기분, 즉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 거절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러한 기분 상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거나, 최소화되도록 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직장 생활 중 상관으로 모셨던 한 임원(이하 ‘임원’이라 칭한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임원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청탁을 받는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청탁을 하러 온 사람들은 회사의 OB이거나 정관계(政官界)에 많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이들의 반감을 살 경우 자리보전이 어렵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들고 온 청탁들 중 상당수가 법이나 사회 통념상에 어긋나는 이권청탁들이었다.
큰 키(185cm)와 잘 다듬어진 체격을 가지고 있는 임원은 청탁을 하러 온 사람이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오면 벌떡 일어나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맞이한다. 평상시에 골프 등 운동을 즐겨 까무잡잡해진 얼굴색, 날렵한 코와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빛나는 눈, 풍부한 까만 머리숱을 가진 임원은 첫인상이 녹록하게 보이지 않는다. 청탁자는 임원의 비상한 모습과 자신감에 찬 허스키한 목소리에 일단 주눅이 든다. 하지만 90도 각도 인사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활짝 웃는 임원의 모습에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펴진다.
임원은 어색하게 청탁내용을 이야기하는 청탁자의 눈을 정시하면서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경청하여 준다. 청탁 내용을 다 들은 임원은 상쾌한 목소리로, “사장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런 일로 직접 저를 찾아 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제가 담당자와 상의하여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취해드리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상대방의 뜻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고서 일단은 긍정적인 대답을 하여준다. 그리고 말미에 공손한 말투로 청탁자도 인지하고 있는 그 청탁의 무리한 부분을 짧게 이야기하며 그러한 무리함은 있지만 자기는 최선의 노력을 해볼 것이라 이야기해 준다. 청탁 승낙여부에 대한 초조한 마음으로 잔뜩 위축되었던 청탁자는 최선의 노력을 해준다는 호의 어린 말에 긴장이 풀리면서 임원에 대한 호감이 극대화된다.
이제는 청탁자가 사무실을 떠날 때다. 임원은 벌떡 일어나 청탁자에 앞서서 사무실의 문을 열어준 후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버튼을 직접 눌러준다. 상대방의 눈을 직시하면서 오늘 찾아와 주셔서 매우 감사하였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음을 말하면서 환하게 웃음을 짓는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청탁자에게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후 시선을 마주하며 여전히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다시 뵙기를 기다리겠습니다."라 말한다.
문이 닫힌 후 싸늘한 표정으로 돌변한 임원은 사무실로 돌아와 비서에게 청탁 관련 업무의 책임 간부와 정보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간부를 호출하라 명령한다. 호출된 간부들에게 임원은 웃음기 없는 근엄한 표정으로 청탁자의 신상과 그가 이러한 청탁을 감히 할 수 있는 배경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하여 자기에게 보고하라 지시한다.
임원은 보고된 내용을 기반으로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경우 상대방이 반감을 가지지 못하게 하거나 이를 최소화하여 회사에 해가 되지 않고 자기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관련 간부들과 강구한다.
청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답을 받은 수많은 청탁자들은 임원에게 어떠한 반감을 표하지 않았으며, 그중 많은 사람들은 회사대표에게 임원의 인격이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처신으로 임원은 승승장구할 것이란 말이 회사 내에서 떠돌았다.
임원은 자기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였는지 60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에 재직 중 지병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