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지기 동성의 친구와 연인이 되었습니다.
첫 커밍아웃은 정말이지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곤에게 친구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도 타진해보면 좋겠다는 답을 듣고, 속이 시원하다고는 했지만 머리는 복잡해졌다.
이렇게 오래 만난 동기동창과 연인이 된다고? 잘못하면 친구도 잃을 텐데?
당장 이야기할 곳이 없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장을 해놓고 14년지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호기심인지 정말 그쪽의 마음이 있는 건지 불확실한 상태. 평소의 내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냥 궁금해서 사귀어보는 따위의 결정도 할 수 있었다.
언제나 연애 관련 이야기를 할 때는 빼놓을 수 없는 친구니까, 이 친구라면 제3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약간의 조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친구는 다짜고짜 건 전화를 받고, 왠지 두서 없는 내 이야기를 기쁜 리액션과 함께 들어주었다.
“와, 어떡하지. 나 십 몇 년 만난 동창한테 고백 받았어.”
“정말?! 많이 친한 친구야?”
“최근에야 좀 자주 만났지, 그냥 꾸준히 봤어.”
“언제부터 친구였어?”
“중학교 때부터 계속.”
“아, 그래? 여자야?”
“어?”
신나게 떠들다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자냐고 물은 친구의 목소리는 “성격은 좋아?”, “어쩌다 다시 만났어?” 같은 걸 물을 때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여자다. 그런데 솔직하게 대답해도 되는 걸까?
어떤 의미로 물어본 걸까?
여기 길거린데. 어쩌지.
어색한 침묵이 길어졌다.
“아, 응. 그……. 나 밖이라서, 일단 집 들어가서 얘기해도 될까.”
“그래그래, 이따 얘기해!”
먼저 전화를 걸어놓고, 머릿속이 띵해져서 후다닥 전화를 끊어버렸다.
침착하자. 내가 당황한 태를 내는 게 아니지.
그런데 어떻게 여자냐는 질문이 먼저 나오지?
집으로 돌아가서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전화를 다시 걸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음, 맞아. 여자야.”
“아, 그래? 조셉 너도 마음이 있기는 해?”
“솔직히 있어. 그런데 내가 사람 사귈 때 너무 충동적이니까, 좋은 친구를 잃어버릴까봐 그게 너무 무서운 거야.”
“맞아맞아. 그럴 수 있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런 식으로 커밍아웃을 해도 되는 걸까.
그런데 친구는 그 이상 친구의 성별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관심이 있는 건 언제부터 썸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느냐 하는 것과, 묘한 기색을 느낀 건 언제부터였는지, 마음도 있다면서 뭐가 가장 걱정인지 하는 것.
터질 듯이 뛰던 박동이 조금씩 가라앉았고, 나는 지금까지 기분에 쓸려서 했던 연애들의 초라한 결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10년지기 대학 동기와 했던 연애에서 이미 너무 큰 실망을 해버려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니면 조셉, 친구한테 솔직하게 얘기해. 지금 나한테 말한 고민 때문에 결정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잘해주는 줄 알고 사귀었는데 막상 사귀고 시간 지나니까 무성의해지는 거 보고 상처받기도 싫다고?”
“응응. 일단 친구한테도 그런 의미로 얘기한 게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좀 그럴 수도 있지만……. 혹시 한 번 만나보고 나중에 결정하는 건 어떻겠냐고.”
“데이트메이트를 제안하라고?”
아니,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그건 그렇고 여자가 상대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잠깐의 딴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말하자면 그렇긴 한데 사실 조셉이 제일 고민인 게 그거잖아. 막상 친구가 아니라 연인으로 만났는데 뭔가 아니면 친구관계도 망그러지잖아.”
“그렇지.”
“그걸 좀, 기분 안 나쁘게 잘 얘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거야.”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되고, 나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난 뒤 통화가 마무리 되기 직전,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대체 고백한 사람이 여자라는 건 어떻게 알아챈 걸까?
“그런데 그, 내가 말하는 친구가 여자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엥? 중학교 친구라며.”
“응. 그러니까 어떻게 알았나 해서…….”
이쯤 얘기하다가 갑자기 뒤통수가 띵해졌다.
아니, 설마.
수화기 너머로 놀란 친구의 목소리.
“아, 너 공학이었어?!”
이 친구에게는 나중에 따로 연락해 고맙다고 했다. 처음으로 커밍아웃한 상대의 반응이 이랬다는 것이 생각보다 나에게 큰 응원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