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guide #1
우리가 만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 꼭 무언가를 해야 하는지, 공통적인 취미의 부재가 관계를 지속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가져오는지, 그것이 과연 금방 찾아질 수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말싸움에는, 특히 로맨틱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의 그런 것에는 큰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꽤나 최근에야 알았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속 상대방의 쏘아붙임에 입을 닫아버리고 만 나. 나보다 큰 사람이 위협적으로 느껴져 그랬을까?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말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논리적으로 맞서는 일이 갑자기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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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N학년 때쯤부터 도서실을 자주 갔던 것 같다. 도서부를 했기 때문인지 친구가 없었기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서 깊은 야외활동 비선호가 그런 내 성향을 만들었음은 틀림없었다. 친하던 사서 선생님이 떠난 뒤, 그 자리를 메운 재수 없는 선생님과 도서실 열쇠를 갖고 싸우다 후배들이 우르르 앉아있는 교실 앞 교탁에서 울어버렸다는 그저 그런 결말. 아픈 기억에도 불구 스펙을 위해 중, 고등학교 때도 도서부를 도맡았다는 에필로그까지. 한편 우리 엄마도 심심해하던 나를 데리고 모 대학 열람실에 자주 갔는데, 숨죽이고 있어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나는 또 가만히 있거나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수밖에 없었다. 조기교육과 본인 논문의 완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현명한 우리 엄마는 야외활동을 장려할 생각까지는 미처 못했던 것 같다.
자기소개서에나 써먹던 이런 스토리는 보통 책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과 그로 인해 갖게 된 독해력이 내게 큰 잠재력이 되었다는 자아도취로 마무리되었으나,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없고 그냥 책이 싫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덕분에 입시에 성공했고 군대에서 잘 버텼다. 한 달에 책 두어 권을 읽어내며 드디어 나도 문학뽀이가 되는 것인가 잠시 착각했지만, 사회로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멀어지고 말았다. 이익과 위기 대처를 위해서만 강해지는 독서 열기. 이러니 누군가 취미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한참 눈알을 굴리다 독서,라고 대답하고는 머쓱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예상치 못하게 도래한 뉴-노멀 시대. 모든 것을 집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마당에, 오그라들거나 무섭거나 슬픈 게 싫은 내게 영화나 드라마의 대부분은 탈락이었다. 로맨스와 해피엔딩에 목을 매는 내게 요즘 넷플릭스의 트렌드는 맞지 않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책을 읽는 것이었다. 군대에서 한국 현대문학의 맛을 봤기 때문에 비슷한 책을 몇 권 사던 찰나 또 나의 독서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다. 모 작가와 관련된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타인의 삶을 무단으로 가져다 쓴 그 책을 나는 친구에게 선물했고, 다른 친구에게 추천했으며, 감상을 쓰는 말 같지도 않은 일을 자행했다. 본인의 글을 읽었던 사람들이 더불어 죄책감을 떠안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비판적으로 작품을 대한다고 한들 이것이 실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심지어는 허가받지 않은 채 타인의 삶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하며 책을 고르고, 선물하고, 읽고 느낀 감상을 적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실제와 허구 사이의 아슬아슬 줄타기를 노렸으나 명백히 실패한 글을 나는 좋아했었고, 출판사로부터 입금된 책 환불금을 쳐다보니 책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당분간 ‘취미없음'의 상태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를 틀면 짤막한 클립이 쉬지 않고 재생되고, 나는 그것을 배경음악 삼아 누워 쉬지 않고 휴대폰을 본다. 트위터를 하거나, 쇼핑을 하고, 기사를 읽는다. 집중하는 무언가가 없음이 크게 아쉽지 않은 일상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이미 최적화되어있는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 혼자일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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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공통적으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무엇이 있을지 고민한 적이 있다. 넷플릭스를 보더라도 서로의 취향은 그다지 맞지 않았고, 유튜브를 보더라도 참을 수 없는 장면이 나오면 나는 바로 꺼버리는 타입이었으나 그는 참고 봐주기를 원했다. 운동신경도 발달하지 않았으니 한 번은 같이 자전거를 타다가 싸울 뻔도 했다. 그나마 둘 다 잘 먹는 성질이라 만나면 맛있는 걸 먹는 것이 주된 일상이었지만, 어떠한 사유로 당분간은 그것 또한 어렵게 되었다. 공통분모가 없다는 명목과 높아만 가는 짜증으로 침묵이 일상화되고 말았으니 자연스레 끝이 다가올 수밖에.
언제라도 발생할지 모를 싸움을 대비하고 있는 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의 다툼이란 참으로도 어려운 것이었다. 상처 주고 싶지만 상처 주고 싶지 않은 그런 것. 정을 붙여버린 사람을 쉽게 싫어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연애에 있어서는 불리한 기질이었다. 적극적인 방어권을 행사하고 너의 논리 없음을 나의 논리로 제압해버리고 싶은데 입은 어버버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할 광경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수차례의 다툼에서 나는 영 맥을 추지 못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들. 입식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그는 태블릿을 두드리거나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고, 나는 멀뚱멀뚱 그냥 가만히 앉아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 그가 무료함을 이겨내고 나를 봐주기를 원했다. 느껴지는 무료함보다 내가 더 중요함을 그것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눈치를 많이 보는 내가, 같이 할 일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지 않도록 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생각의 차이란 쉽게 좁혀지거나 타협되는 것이 아니었고 나 또한 더 이상 행복한 전개를 기다리고만은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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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루는 일부분이 문제라는 생각은 너무 슬프니까. 피해를 일으킬만한 객관적 문제가 아니라면, 취향으로 갈릴만한 나의 무언가를 굳이 바꾸고 싶지는 않다. 타입이 맞는 사람이야 찾으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냥 나로서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인 내게 맞는 남자가 꼭 있으리라 확신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당분간은 남자를 만날 여유도 없다. 그렇지만, 조만간 진행될 낯선 남자와의 대화에서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