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1주일간의 꿀 같은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일이 몰리기 시작했다. 카탈로그 쇼핑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TV홈쇼핑사들과 함께 대우, 두산, 한솔, SK 등 대기업들이 뛰어들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300페이지에 달하는 카탈로그는 각 페이지를 바둑판처럼 나누고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판매하는 상품을 카테고리 별로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중간 중간 브랜드별, 상품별 기획페이지를 구성하여 고객에게는 통신판매책자가 아닌 트렌디한 잡지를 보는 느낌을 전달하도록 만들어졌다. 내가 입사한 해가 2004년이었으니 나는 카탈로그 쇼핑 업계가 정점을 찍었던 바로 그때 그 일에 뛰어들었던 거였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지만 당시에는 유명 모델들이 등장하는 홈쇼핑 카탈로그를 거실 탁자에 놓아두고 시간 날 때마다 뒤적이다 마음에 드는 상품을 발견하면 전화를 걸어 구매하는 것이 흔한 풍경이었다.
카피라이터인 내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달마다 새로 추가되는 상품에 대한 짧은 헤드카피와 상품설명을 작성하는 것과 TV홈쇼핑사가 요구하는 브랜드나 상품에 대한 스페셜 페이지를 기획하고 카피라이팅까지 맡아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상세페이지를 작성하거나, 서비스기획을 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 업무를 2주 만에 마치기 위해 추가되는 상품에 대한 헤드카피와 상품설명을 거의 타자 연습하듯이 뽑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1분에 공백제외 100타를 쳐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필사가 아니다. 문장이 아닌 캡션처럼 정리된 제품설명을 상품설명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상품을 인지하는 동시에 타깃을 설정하고 헤드카피를 마치 필사하듯이 뽑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첫 달은 정말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처음 하는 일이니 이번 달만 일정을 늘려줄게’라거나 ‘처음 하는 일이니 이번 달만 상품설명을 좀 어설프게 써도 봐줄게’라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지난 달 발행했던 카탈로그보다 더 고객의 입장에서 더 매출을 늘릴 수 있는 더 참신하고 완벽한 카탈로그를 만들어줘.’가 매달 주어지는 미션이니까. 여기에 홈쇼핑 카탈로그 카피라이팅 업무를 기피하거나 무시하는 당시 분위기도 나를 힘들게 했다. 광고라 하면 모름지기 ATL, 즉 TV, 라디오, 신문, 잡지 매체만 쳐주던 시절이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몸과 마음이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잃기만 하는 인생은 없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정말 꼰대 같은 말이란 것을 알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겨우 신입 딱지를 뗀 초짜 카피라이터였던 내가 중견 카피라이터로 도약하며 홍대와 청주대 등 대학 강의까지도 맡을 수 있었던 건 매달 새벽까지 정신없이 홈쇼핑 카탈로그 카피를 쳐내던 바로 이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