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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 큰 나무의 미혜 Dec 04. 2022

글을 썼었다.



 밟으면 산산이 바스러질 나뭇잎을 떨어내느냐고 앙상해진 나뭇가지 사이로 가을이 지던 어느 날. 나는 모든 채움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었다. 설레던 봄과 찬란한 여름을 지나 찰나의 반짝임으로 가을은 저물었고 그 순간이 마치 꿈만 같아서 울컥 복받쳐 올랐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과거의 내가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려 힘겹게 몸을 움직이며 속으로 생각하다가 그마저도 하기 싫어져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었다. 우리는 텅 빈 화면 위에 어떠한 한 줄의 문장이 되려고 했을까? 그 문장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면 빼곡했던 글자 수만큼 마음이 채워졌을까? 갑자기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찬 기운이 콧속 가득 밀려와 약간의 현기증이 일렀다. 마음에 비가 내려 으슬으슬 떨린다. 여전히 글쓰기 모임에서 인사도 못 한 채 이별한 A를 애도한다. 사실은 글을 쓸 때마다 A가 떠오른다.


 힘겹게 적어 브런치에 저장해둔 글 한 편을 끝끝내 발행하지 못했다. 혹여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봐 수면으로 띄우지를 못하겠다. 오랜 시간 바다 같은 마음에 머물러 묻고 답하기를 반복했다면서도 결코 붉게 칠해질 감정의 두려움은 떨쳐낼 수가 없다. 그럼에도 A를 남겼던 글이라 삭제를 누르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어느 가수가 부른 한 줄의 시를 얼마나 쉽게 들었는지 돌아보며 글을 썼었다. 그러면서 단 한 줄의 문장도 가벼이 쓴 적이 없었다며 희뿌연 화면 위로 검은색 문자를 꾹꾹 눌러 칠했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그동안 글을 썼던 욕구가 와르르 무너져내려 쓰는 행위에 물음표가 생겼다. 단순히 좋아서 썼던 글, 마음을 풀어내려 갈겨댔던 글 이상의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뭔지 모를 부유하는 수많은 조각 중 단 한 조각이라도 잡으려 부단히 바둥거리는데 손끝조차 닿지를 않는다. 요즘에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도 되지 못하는 A4 한 장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이토록 내가 사방으로 흩어져 어느 하나 손에 잡을 수 없을 때는 도서관으로 간다. 긴 시간 책의 숲 사이를 뛰어다니며 문장의 나부낌을 바라보면 마음에는 잔잔한 바람이 일어난다. 점점 글을 읽지 않는 세상에서 과거의 누군가가 끝없 물을 한 줄의 문장이 그리 쉬이 지지 않아 참으로 반갑다. 그 수없이 흔들리는 문장의 반짝임에 취해 아무런 가치도 매길 수 없는 글을 습관처럼 희뿌연 화면 안에 또다시 채운다. 우리는 왜 깊은 수심에 잠겨 써낸 한 줄의 문장을 기어이 내보였을까? 이 글에 발행을 누른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서일까? 처음으로 글을 생각하며 글을 썼다. 그리고 지금도 글을 쓴다. 누군가는 후루룩 삼키거나 슥 넘겨버릴지도 모를 글을 쓰기 위해 내 안 깊숙이 들어가 앉았다. 나는 책의 숲에 둘러싸여야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다. 읽지 않더라도 책 한 권 들고 다니며 무엇일지 모를 그것을 찾기 위해 무던히 헤매야만 한다. 어쩌면 간절히 찾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수히 반짝이는 책 속의 어느 한 구절에 위로받으며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글자로 옮겨 적어야 할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림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괴로워하며 그리고 쓸 것이다.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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