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불안정한 상태의 강수현상
진눈깨비는 쌓이지 않고 그대로 녹아 여기저기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날씨는 눈보다 비 쪽에 가까운 듯 짙게 낀 먹구름에 색을 잃어갔다. 빠져나간 통장의 잔액만큼이나 무거워진 장바구니를 차 앞좌석에 실었다. 스마트폰으로 태권도 학원 끝나는 시간을 확인한 후 다급히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겨우 50분이 지나고 만난 아이들은 나의 계절과 다르게 생기가 넘쳐 반짝거렸다. "엄마! 관장님이 발차기 잘했다고 빅파이 주셨어!" 달뜬 목소리와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살아 넘쳤을 시간을 증명했다. 잘했다며 머리를 슥 쓰다듬어줬지만 흐린 날씨 탓인지 마음에는 아무런 빛도 들지 않았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쫑알쫑알 떠드는 이야기에 "응, 응"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또 뭘 하지? 하루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장 봐온 찬거리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고는 기나긴 겨울방학의 시간표를 멍하니 바라봤다. 벽에 붙은 A4용지에는 학교에서 내준 숙제와 내가 적은 해야 할 일들로 줄줄이 쓰여있었다.
"얘들아 공부하자!"
공부하자는 말에 큰아이가 가자미눈이 되어 매섭게 쏘았다.
"아, 싫어! 오늘은 방과후 학교도 갔다 와서 피곤하단 말이야!"
벽에 반쯤 기대 누워 오물오물 빅파이를 씹느냐고 바닥에 부스러기가 잔뜩 떨어져 있었다.
"그럼 뭐할 건데?"
슬슬 올라오는 화를 누르며 담담히 물어봤다.
"TV 보면서 과자 먹을래"
"안돼! 저녁에 게임도 하고 TV도 보잖아! 할 일부터 해!"
엄마의 강요에 쭉 나온 입으로 푹 책상에 엎어졌다. 서둘러 여기저기 흐트러진 과자 가루를 손바닥으로 쓸어모아 버리고 문제집을 가져와 아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계산법 중에서 예솔이 조금 헷갈리는 덧셈 부분을 펼쳤다.
"수학은 이거 한 장 풀자"
이왕 할 공부라면 즐겁게 하자는 생각으로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
"아, 하기 싫어, 아, 하기 싫어, 아, 하기 싫어"
15분이면 다 풀 간단한 문제를 지렁이 같은 숫자로 꼬불거리며 하염없이 흘려보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져 문제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었다.
"엄마랑 같이해볼까? 23 더하기 8은?"
"아! 혼자 할 수 있다고!"
빽 소리를 내지르더니 순식간에 한 장을 끝내버렸다.
"우와~ 이렇게 잘하면서~"
괜히 호들갑스레 칭찬했다. 이어서 무지 노트를 꺼내며 물었다.
"알파벳은 어디까지 기억나?"
"아씨, 기억 안 나"
계속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때 책상에 엎드려 알파벳을 끄적이던 예솔이 말했다.
"엄마보다 아빠랑 있는 게 좋아."
그 말이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던 나의 버튼을 꾹 눌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겠지만, 속에서는 펑! 하고 곧 폭발할 시한폭탄처럼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째깍째깍 줄어드는 숫자를 따라 그동안의 육아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분명히 내가 선택한 육아고 하루에도 수없이 웃을 정도로 행복하지만, 자신이 지워지는 모습에 쏟아지던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워낙 학교생활을 힘들어하는 아이여서 또 나를 그려가는 길에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겨울방학이었다. 뭐 아직 어린아이가 그렇게까지 말하건 아니겠지만, 내게는 약 7년의 최선이 무시당한 것만 같아 폭풍이 소용돌이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TV를 켜고 알파벳 만화를 틀었다.
"예솔아. Kite가 뭘까?"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어조였다.
"몰라"
"잘 봐봐. 뭐가 날아가지?"
"몰라. 몰라. 몰라. 몰라"
5.4.3.2.1. 모른다는 되돌이표와 함께 드디어 폭탄이 터졌다.
"그만하자"
띡! TV를 끄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냉장고로 걸어가 저녁 반찬 만들 재료를 꺼냈다.
"엄마, 미안해. 다시 공부하자"
아무리 붙들고 빌어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이제 공부하지 말자. 돌봄교실 신청할게. 학교에서 선생님과 공부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아빠랑 놀아. 엄마도 하고 싶은 일 할래"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꾹 누르고 있던 브레이크가 고장 났는지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마침내 엄마의 모진 말에 아이는 제발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펑펑 눈물을 흩날렸다. 진눈깨비는 시린 밤거리에 한없이 젖어 들어 우리 사이에 건너지 못할 깊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나는 아이의 눈물을 보랏빛 우물에 담근 채 초점 없는 눈으로 딱딱 채소를 썰고 찌개를 끓였다. 뽀글뽀글 끓어오르는 냄비 위로 희뿌연 연기가 자욱해졌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이만큼 나이를 먹었는데도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이와의 싸움이란 게 그리 길지는 않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좀 더 순수한 쪽이 찬란한 햇살이 되어 고인 마음을 뽀송하게 말려준다는 것을.
눈이 부시게 반짝이던 빛에도 아직 아이의 눈물을 담아둔 보랏빛 우물에 잠겨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토록 기다린 태아의 심장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사랑으로만 키우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나 역시 차가운 눈길로 쌀쌀맞게 말하는 친정엄마와 다를 바 없다. 문득문득 부모와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을 내게서 발견할 때마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벌벌 떨던 어린 내가 보인다. 시린 밤이다. 시야를 흩트리던 진눈깨비는 멈췄지만, 밤의 아스팔트는 축축이 젖어 들어 더욱더 짙은 모노톤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