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 멀리 바다가 시작되는 점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뭐지? 이 방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었나? 혹시나 짙은 해무를 잘 못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이나 두 눈을 비비며 다시 봤다. 하지만 흐릿한 형상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형상은 가까워질수록 또렷해졌다. 그것은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뭔가 좀 괴기했다. 땅에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없는지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허공을 걸었다. 그 때문에 두 어깨는 번갈아 가며 위아래로 심하게 휘청였고 고개는 좌우로 크게 흔들거렸다. 반쯤 정신을 잃은 듯한 초점 없는 까만 눈동자만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몸은 얼음처럼 굳어갔다. 손발 끝이 파랗게 차가워지고 가까스로 내쉰 한숨에서는 얼음 알갱이가 섞인 차가운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얼어붙는 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기적거리며 다가오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늘 그랬다. 좋은 일 뒤에 나쁜 일이 따랐다. 아니, 더 큰 불행이 닥쳤다. 마치 운명이란 녀석은 그녀가 꿈꾸길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덧 아이는 코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내려다봤다. 아이의 키는 약 120cm 정도로 조그마했는데 그림자가 드리우자, 기이하게도 한 줄기의 빛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 기운에 압도당해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멀리 있을 때는 파도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는데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처럼 끼익 끼익 울부짖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들어보니 괴성 속에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줘.” 아‥ 소름 끼치는 모습과 다르게 이 얼마나 하찮은 청인가. 왠지 가엾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어떻게 찾은 편안함인데, 이 고요를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미안.” 그녀는 겨우 들릴 듯 말듯 가늘게 대답했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쏟아져 내렸다. 콰르릉 강하게 내리치는 천둥번개에 놀라 바다를 돌아보니 검은 파도가 해안으로 무섭게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푸른 문을 찾았다. 다행히 푸른 문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이는? 아이가 걱정되어 정면을 바라봤더니 어느 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파도는 모래사장에 가까워질수록 작은 물결들을 흡수하여 파고가 높아지고 속도가 빨라졌다. 너울은 지축을 흔드는 듯한 굉음을 내며 그녀의 발밑까지 덮쳐왔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푸른 문을 향해 뛰었다.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느냐 숨이 턱에 차고 다리에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푸른 문이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투명한 문고리를 향해 힘껏 몸을 던졌다. 그때 무언가 발목을 잡아당겼다. 철썩! 물결이 솟구쳐 오르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차츰 파도가 낮아지고 거세게 몰아치던 비바람도 잦아들었다. 해무까지 모두 걷혀 고요로 가득 찬 바다의 방에는 잔잔히 흔들리는 바다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공포' 작업 노트>
글을 못 쓰는 걸 아는데 쓰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하고 싶은 일이 업이 되도록 잘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내 못난 모습을 계속 봐야 한다는 게 너무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