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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Nov 10. 2021

긴가민가 하는 시간들

2019년 11월 8일

구나 한의원 스케치가 시작된 날 


입동을 맞은 어제 하루의 추위로, 걸어 들어오는 입구에 서있는 감나무 잎은 몇 시간 사이에 모두 떨어지고 잎 사이사이에 가려 있던 감들은 ‘나 여기에 있소 ‘라는 것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지난여름 무더위로 벌레를 많이 타서 먹을 만한 것은 얼마 없습니다. 

대신 새들이 방해받지 않고 쪽쪽 쪼아 먹고 있습니다. 

한 마리가 날아오면 또 한 마리가 날아오고, 어른 손바닥 만한 새들이 주르르륵 달려듭니다. 


우리 집 고양이 깜선 생은 새 사냥을 좋아합니다만, 감나무에 앉은 새들을 잡기에는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입동 하루 만에 고춧잎, 가지, 피망, 토마토 잎도 모두 시들었습니다. 처진 잎들만 보입니다. 그나마 허브류와 남천, 장미들은 아직 쟁쟁합니다. 남천만 빼고는 허브류와 장미들도 곧 겨울을 맞아 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어제는 먼길에서 건축상담을 받으러 오신 분이 계십니다. 오전 일찍 오시기로 했는데 11시 30분이 되어서 도착하신다고 하니, 맞추어 놓았던 일정이 잠시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어, 책을 볼까, 글을 쓸까, 건축 계획안 마무리 스케치를 할까 망설이게 됩니다. 사무실 햇살도 좋은데 음악 듣고 책을 좀 보자는 쪽으로 타협을 보았습니다. 


보는 책중에는 건축책이 많습니다. 

건축가들에 대한 책, 참고할 만한 건축 작품집, 건축은 아니지만 그와 연관된 정원, 빛, 조명, 소리, 가구에 대한 책들도 얼마 정도는 있습니다. 그중에 요 몇 달 곁에 두고 읽는 책들을 꼽아보자면 나카무라 요시후미 선생의 ‘집‘에 대한 연작들과 흥선 스님의 ‘맑은 바람 드는 집‘, 소우 후지모토의 ‘건축이 태어나는 순간‘ 같은 책들입니다. 이 책들은 두고두고 보게 됩니다. 


먼저 요시후미 선생의 책은 저랑 색깔이 맞는다고 할까요? 멋 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장소들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노장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그런 건축가입니다. 흥선 스님에 대한 글은 다음번에 자세히 써보려고도 합니다. 일전에 스님이 기거하고 계신 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차담도 나누고, 쓰신 책과 삶이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마음에 담아 둔 분입니다. 좋은 건축가들도 많은데 하필 일본 건축가들을 좋아하냐고 핀잔을 줄 사람들도 많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지금은 일본 건축가들의 작품세계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중에서도 저와 나이가 비슷한 소우 후지모토의 ‘건축이 태어나는 순간‘은 제가 입으로 다 표현할 수 없던 건축적인 이야기들을 후지모토의 입을 통해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 된다고 할까요? 그의 글을 보면서는 ˝그래 맞아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긋고, 두고두고 그 대목을 다시 보게 되는 책입니다. ‘노자‘의 세계를 건축적으로 표현하는 건축가라고 할까요? 사이와 사이에 대한 그의 공간 철학이 저를 끌어당기는 부분입니다. 


책이 가진 매력은 액정화면에 비할 수 없습니다. 저로서는 지금까지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책에 밑줄을 긋는 동안 오기로 하셨던 건축주분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주었습니다. 전화 목소리로 상상하던 분과는 다른 음 뭐랄까요? 진지한 개구쟁이 같은 중년의 여성분이 조금은 미안한 듯이 반갑게 웃으며, 마치 제가 손님이고 당신이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이런 입장과 분위기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커피 괜찮으세요?˝

˝네 좋아요 커피 좋지요˝


커피를 준비하는 시간이 어색할 틈도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알게 되었는지, 소개해주신 분과는 어떤 사이인지, 10년 전에 5년 전에 그리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잠시지만 커피를 내리고 커피 향이 오르고, 잔을 따뜻하게 데우고, 선생님 앞으로 내어 드리는 그 시간 동안, 짧은 라이프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커피집에서 일하는 점원이었고 선생님은 카페의 주인인 것 같은, 역시 그런 분위기가 또 만들어졌습니다. 


선생님의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중국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한국에서 한의사 분과 함께 의원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해요. 몇 해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이 있는데, 2층 건물을 물려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유산을 처분하고 싶지는 않고 그곳에 한의원을 개원하고 싶은데 현재는 주택이라서 공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건축가로 살다 보면 새로운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는 게 일입니다. 그 일은 심심하지도 않고, 단조롭지도 않은 길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면 보물찾기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도대체 보물을 어디다 숨겨놓으신 건지 찾을 수 없을 때도 많았습니다. 분명히 보물이 있기는 한데 한동안 찾아 헤매는 시간이 도시락 먹는 시간과 함께 소풍의 매력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건축이 그것과 조금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이들을 위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 헤매고 헤매는 과정이 비슷합니다. 보물 쪽지를 찾았을 때 기쁨처럼  의뢰자의 마음과 우리 건축가들의 마음에 드는 보물찾기 같은 일입니다. 


이번 일에서는 어떤 보물을 찾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감잎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감추어져 있던 감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날 또 새로운 일을 준비하게 됩니다. 연애할 때 상대의 마음을 알듯 모를 듯해야 긴장감이 있고 설렘이 더해졌던 것처럼 또 하나의 새로운 장소를 1:1로 마주할 때 까지는 긴가민가 하는 시간을 준비하게 됩니다. 


<산중에 사니까 좋겠다고를 말합니다. 그냥 웃습니다. 일 줄이고 마음 맑혀 고요히 살고 있다면 예, 그렇지요 하고 시원스레 답하련만, 일은 늘고 마음밭엔 잡초만 수북하여 소란스러움 속에 날이 지고 밤이 새니 열없어 웃을 밖에요. 몸은 산속에 있는데 마음은 아닌 듯하니, 일에 쫓겨 동동거리는 자신이 때로는 한심하고 때로는 우습기도 합니다. 곰곰 생각해도 답은 매한가지인 듯합니다. 일 줄이고 마음 맑혀 고요히 살 것! _흥선 스님의 맑은 바람 드는 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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