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9일
생활의 세 가지 요소는 옷과 음식과 주택이라고 합니다. 올해 초부터 아내와 저는 밥을 제대로 먹는 일에 좀 더 시간을 쓰기로 했답니다. 건강하게 제철음식을 준비하고 해 먹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외식도 많이 하고 인스턴트 음식도 자주 먹었습니다. 음식 준비는 아내의 몫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지,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내에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먹어보자˝를 외치며 시작한 아내의 제철음식 공부는 우리 가족에게 큰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20년 가까이, 생협에서 유기농 제품을 먹으며, 바르게 먹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가공된 제품을 많이 먹었습니다. 생협이 문제가 아니라 만들어진 음식을 사 먹으면서 조리하는 문화로부터 점점 멀어진 것입니다. 채소류 등의 재료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공장에서 생산된 현미 국수, 빵, 과자, 라면 같은 음식을 자주 먹고 간단히 끼니를 해결해왔죠. 어느덧 균형 있는 식단과는 거리가 먼 ‘가공식품 곡식 주의자‘로 사는 우리 가족을 돌아본 것이죠. 먹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배고픈 것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식사를 준비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는 ‘제철 밥상‘에서 배춧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추운 겨울의 초입에 맛본 따뜻한 된장국은 밥, 국, 김치만 있어도 밥상이 충분하도록 해주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제철음식을 배우러 지리산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정확이 이야기하자면 아내가 배우고 저는 운전을 하고, 딸아이는 동행을 합니다. 제철 밥상에서 수강생이 아닌 우리 부녀도 밥 식구에 끼워 주면서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모두 그곳에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한 집에서 같이 밥 먹는 사이를 ‘식구(食口)‘라고 하지요. 한 달에 한 번 ‘세끼 가족‘을 만나고 있습니다.
‘제철‘이라는 시간성 때문에 ‘그때‘만 먹을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엄마들은 음식을 만들고, 딸과 저는 수저와 젓가락을 들고, 음식 평가단 같은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음 오늘 밥상도 가슴 떨리는 정성 100, 맛 100, 요리 수준 100˝ 백점만으로는 부족해서 후하게 점수를 주게 됩니다.
쌀쌀한 비가 오는 11월의 중순, 김장철을 맞아 보쌈수육, 생굴, 김장김치, 배추 된장국, 쌀밥이 단정하게 준비되었습니다. 한 끼 식사를 맛있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밥 먹는 시간이 행복해집니다. 며칠 후 김장을 할 예정인 아내는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요리 선생님께 마당에 장독을 어떻게 묻어야 할지, 김장김치는 독에서 언제 꺼내 먹어야 할지, 알뜰하게 묻고 노트에 적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건축가는 어떤 장소를 만들어 내지만 그 장소를 그곳답게 쓰는 일은 사람들 몫입니다. 재료의 크기를 다듬는 도마와 칼, 물을 쓰는 설거지, 색색이 그릇과 수저, 음식의 구성, 사람들의 몸짓과 활기찬 소리들은 그곳에 어울리는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20여 명의 어른들이 모여 제철 재료를 다듬고, 준비해서 불을 맞추고, 버무리고 자르고, 입안에 든 맛을 이야기하고, 설거지 하고, 한 끼 마무리 차모임까지 일어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기도 하고 글로 적거나 스케치를 할 때도 있습니다. 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아침, 점심, 저녁의 풍경은 건축가인 저에게 보너스 같은 경험입니다.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어깨 너머로 요리를 배우는 한수의 시간이기도 하죠.
김장김치와 배춧국을 먹으며, 요리 선생님에게 ˝선생님 같은 재료인데, 어쩜 이렇게 맛이 다를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웃으시며 ˝그러게요 모두 다르죠. 저도 신기해요˝
건축물도 다르지 않은데 말이죠. 같은 재료, 같은 땅, 같은 시간이 주어져도 그 집에서 살 사람, 그 집을 지을 건축가들이 누구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하루 한 끼의 밥과 반찬을 만드는 일은 ‘식구‘를 위해 집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철 밥상‘에서 매 끼니마다 생겨나는 활기찬 주방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일본 오부세의 아침 식당이 생각납니다. 요즘 디자인하고 있는 장소는 오부세의 식당과 제철 밥상의 주방 모습 같은, 분위기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빵을 구울 수 있는 오븐 자리도 있고, 아침 해가 충분히 들 수 있는 동쪽으로 창이 난 수다스러운 주방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건축가 페터 줌 토르 선생의 말씀처럼 ‘분위기‘있는 장소가 필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