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9일
<햇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벽에 어깨를 기대고 있으면 우리를 받쳐 주고 있는 벽의 든든함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에블린 페레 크리스텔의 ‘벽‘ 중에서>
˝도시락을 싸서 왔어요, 같이 드실래요?˝
˝네 선생님 같이 먹도록 할게요. 언제쯤 도착하세요?˝
˝20km 남았다고 나오네요˝
˝네 저도 그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도록 할게요˝
목소리만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기분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들이다. 나는 어떤 목소리를 하고 있을까? 한 달 여전에 모 방송국과 인터뷰를 했었다.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할 때는 몰랐는데 편집된 방송을 보면서 내 목소리에는 어떤 색깔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매일 같은 톤의 감정을 유지하지는 않지만 ˝대개는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구나˝를 지켜볼 기회였다.
내 목소리는 차분하고 차근차근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그렇게들 보아주니 칭찬으로 들릴 때도 있고, 때로는 평이하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한 해 전에 산미가 가득한 커피를 보내주시는 양 사장님 카페에서
˝건축가님 커피맛이 어때요?˝
여러 개의 커피 서버에 산지도 다르고, 로스팅 정도도 다르게 내린 커피를 내놓으시며 커피 맛을 물었다.
˝오 맛있어요. 이것도 맛있고요, 세 번째도 맛있는데요, 다른 곳에서는 맛보지 못한 맛이에요˝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로, 밋밋하기 그지없는, 맛있다는 표현에 양 사장님은 아주 단호하게
˝저는 건축가님처럼 표현하는 사람은 별로입니다. 다른 표현은 없나요?˝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더 마시기를 망설이는 나에게 양 사장님은 당신이 좀 짓궂었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맛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세계들이 있어요. 제가 내리는 커피들은 모두 다른 산지에서 온 것이고, 그곳의 토질, 물, 산지의 농민들, 커피 열매를 따서 후처리 하는 과정이 모두 달라요. 맛이 다를 수밖에는 없지요. 마지막으로 제가 로스팅을 하는 정도에 따라 커피 본연의 특징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어요. 마시는 사람의 혀에서 느끼는 차이도 있고요. 그러니 ‘맛있어요 ‘라는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제 입장에서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랍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듣고 싶은 표현들이 있다. 우리들이 공사를 마친 집에 입주한 건축주들, 1~2년 새집에서 살아본 집주인이 ˝집이 좋아요˝ 할 때보다는, 구체적인 생활의 언어로 이야기할 때, 그 장소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고 느낄 때, 예를 들자면 ˝전에 살던 곳에서는 편히 잠을 잔 기억이 얼마 없었는데, 이사 와서는 정말 편하게 잘 수 있어서 좋아요˝, ˝건축가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직업 같아요˝ 이런 표현들은 며칠을 두고 기억이 난다.
며칠 전에도 커피 해피에 다녀왔다.
양 사장님은 특유의 미소와 유쾌한 표정으로 온두라스, 케냐, 과테말라 커피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커피잔에 조금씩 따라 주었다. 한 모금씩 3가지의 커피를 다 마시고 나자
˝커피맛이 어때요?˝
맛에 대한 핀잔을 들은 후로 ‘리얼‘(real)한 맛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1년을 넘었다. 나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당기면서 양 사장님 가까이 어깨를 가져갔다. ˝음 이번 온두라스는 산미가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지네요. 마치 아침햇살에 안개가 삭 하고 사라지듯이요, 과테말라는 묵직하게 바디감이 있어요. 로스팅을 평소보다 더 하신 것 같아요. 입안에 든든한 향이 남아요, 마지막으로 케냐 피베리는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 마시면 좋겠어요, 온두라스와 과테말라와는 다르게 산미도 깊고 향이 오랜동안 혀에 남는데요˝
양 사장님은 기분 좋은 웃음으로 ˝그렇죠, 케냐 피베리가 오늘 하고 잘 어울려요˝ 양 사장님도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그나저나 우리 카페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 오늘 시간 좀 되죠?˝
인생 이모작을 새로운 장소에서 시작하고 싶은 세자 매분을 만나고 왔다.
지금은 서울 강북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30년 넘는 아파트 살이를 마치고, 땅에 내려오고 싶다고 하신다. 소풍 오시듯이 도시락을 준비해서 오셨다.
˝찰밥을 가져왔어요. 찬은 없지만 같이 드셔서 좋네요˝
햇찹쌀에 밤, 팥, 잡곡을 넣고 소금 간을 한 맛있는 찰밥이다.
전화로 두 번 통화 목소리를 듣고 처음 만난 세 자매 아주머니들과 수다스럽게 점심을 먹었다.
인생 이모작을 위한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다음에 또 뵙기로 약속하고는 헤어졌다.
문자로 ˝선생님 먼길 조심히 올라가세요, 오늘 찰밥은 엄마가 해준 그 맛이에요.˝
맛을 너무 밋밋하게 표현한 것 같기는 해도 엄마라는 구수하고 따뜻한 햇살 같은 밥이 어디에 또 있을까?
오늘 아침에는 어머니가 전화를 주셨다. 이번 주에 시간이 되는지 물으시며, 열무김치랑 담가 놓을 테니 고구마랑 같이 가져가라 하신다. 가을바람 같이 어머니의 열무김치 맛을 보러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