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에 두레생협 매장에서 무가 도착했고, 소금에 절인 배추는 그제 오후에 도착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김장을 한다고 하면 동네 형님은 코웃음 칩니다. "20포기도 아니고 10포기도 아니고 8포기도 김장이냐?". 그래도 김치통 두 개에 가득 담고 작은 통하나 가 더 필요합니다. 어머니가 2통을 보내주시고, 집에서 2통을 담고 나면 뒤늦게 부산에서 1통이 도착합니다. 이렇게 5통의 김장김치로 이듬해 3월까지 김치를 먹습니다. 젓갈이 가득 들어간 부산 김치는 제일 먼저 먹어야 제맛이 나고 다음은 우리 집 김치, 가장 나중에 어머니의 김치를 먹습니다. 봄이 시작되는 계절에 우리 동네 식사 모임에서 어머니 김치는 인기가 좋습니다.
“나도 김장할 거니까 학교 다녀오고 저녁에 같이 담그자”
“그럼 피아노 수업을 빠져야 하는데 괜찮겠어?”
“응 하루만 빠지지 뭐”
딸아이가 피아노 수업을 빠져도 좋다고 하니 올해는 일손이 한 명 더 늘었습니다. 피아노는 일주일에 세 번 가고, 김장은 일 년에 한 번이니 어린이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집니다.
하루 전날 다듬고 씻어 놓은 갓과 파를 4센티(아내의 요청) 길이로 썰고, 어머니가 보내주신 고춧가루를 풀고, 멸치와 채소로 채수(야채 물)를 냅니다. 배와 무는 믹서에 갈고, 불려놓은 생강의 껍질은 까서 작은 돌절구에 빻습니다. 딸아이가 학교에서 오기 전에 저는 학부모회의에 짬을 내어 다녀오고 그 사이 아내는 갖은양념 준비를 합니다. 재료의 준비와 저의 하루 일정까지 꼼꼼하게 아내의 계획 속에 이루어집니다. 올해는 절임배추 덕분에 정말 수월합니다.
김장을 하고 나면 배추 입사귀, 무청 꼬다리, 마늘 껍질 같은 부산물은 2년 후에 흙으로 돌아갈 퇴비장에 가득 차게 됩니다. 퇴비장 근처에 사는 생쥐가 10%로는 가져갈 것이고, 깜선 생(고양이)은 야밤에 쥐를 잡고, 동네에서 음식물 처리는 각 가정의 퇴비장이 해결합니다. 시골에 살면 버릴 것이 별로 없고 알아서 해결이 되네요.
불이 집의 중심이던 새마을운동 이전까지만 해도 '주방'은 '부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주방이라는 이름은 아파트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보편화되었습니다. 부엌에는 식사를 준비하는 취사의 기능과 함께 방을 따뜻하게 난방을 할 수 있는 아궁이의 부뚜막과 구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주방은 가스레인지나 쿡탑만 있어 기능이 단순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리사의 불을 다루는 주방의 규모가 홀의 크기 만한 동네 짬뽕집처럼, 부엌은 ‘불을 다루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집의 중심이 되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만 해도 이사한 집에 집들이를 갈 때면 팔각 성냥을 선물로 가지고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윤영의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에서 ‘조선시대에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갈 때 행하는 입택 의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새 부뚜막에 불씨를 붙이는 것이다. 30~40년 전만 해도 이사를 갈 때는 옛집의 아궁이에서 불을 붙인 번개탄을 주부가 직접 들고 갔는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이 집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는 생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의 장소, 가족의 구성, 다양한 직업은 집의 모습뿐만 아니라 사는 방법에도 변화를 주었습니다. 앞으로의 주방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요? 제가 추측하기로는 TV와 소파 중심의 거실 기능은 줄어들고 식당과 주방이 더 확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내의 역할이던 음식 만들기는 가족이 함께 요리하고, 식탁은 식사뿐만 아니라, 책을 보고, 차를 마시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집이 아들방, 딸방, 안방, 작은방, 거실, 주방과 같이 칸막이로 실을 나누었다면, 핵가족화와 1인 가구의 증가, 생활패턴의 변화로 방의 개수는 줄고 다양한 기능을 담을 수 있는 복합적인 장소가 주방과 식탁을 중심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73센티 높이의 식탁에 둘러앉아 배추, 갓, 파, 마늘, 생강, 무를 다듬고 썰고 갖은양념이 된 재료를 배추에 비비고, 김치통에 담았습니다. 주방의 싱크대 높이는 89센티 높이로 장시간 서서 일하기에는 어정쩡합니다. 우리 집의 중심은 이사를 올 때부터 식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보고, 손님을 맞이 하고, 요리하고, 차를 마시고, 글을 쓰고, 영화도 봅니다. 가구 공방에서 공을 들여 주문 제작한 우리 집 식탁은 손때가 많이 묻었고, 쓰임도 다양한 장소입니다.
몇 해 전에 양평에 집을 지은 건축주분이 집에서 밥 한 끼 하자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어찌 사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밥을 해 주신 다니 기쁜 마음으로 시공 소장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김장을 했는데 같이 밥 먹고 싶어서 불렀어요. 반찬은 김장김치만 놓고 먹어도 되죠?” 식탁에 앉아서 김장김치 한 포기에 고슬고슬한 밥, 국그릇을 놓고 건축주 내외분과 저와 시공 소장은 김치를 손으로 찢고 손가락을 빨며, 맛있는 저녁을 먹은 기억이 나네요. 밥해주는 건축주 부부하고는 지금도 연락을 나누고, 매년 가을이 되면 제철 포도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건축일을 그만둘 때까지는 보내드릴 것 같군요.
어제 김장을 마치고 아내는 “다른 반찬 없어도 되겠지? 김장 김치하 고만 먹어도 맛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