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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짜 Jan 26. 2020

어떤 실패들

feat. 상담사도 우울할 때 있다

상담심리사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 내내 마음을 끓이던 중이었다. 하소연이나 할 생각으로 엄마, 동생, 친구에게 전화했는데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 전화 좀 받아줄래?) 전화를 받은 친구는 자취방에서 삼겹살을 우겨넣으며 저녁을 먹다 말고 내 푸념을 들어줬다.


그날 난 회사에서 어떤 프로젝트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했다. 내 오판으로 손실이 생긴 건 아니었지만 중요한 일에서 판단 미스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고 속상했다. 내 오판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실망했을지 상상하니 괴로워졌다. 말을 내뱉던 그 상황의 내가 자꾸 기억 나 못 견디게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수면 아래로 한참 가라앉아 있던 과거의 내 실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수면 위로 떠올라 하나로 꿰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역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친구는 아주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느 분야든 초심자일 때 가장 자신감이 폭발하고 중급자가 됐을 때 자신감이 확 꺾이는 경험들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실패들을 겪고 경험치를 쌓으면서 다시 서서히 완만하게 자신감이 오르기 시작한다고. 모든 프로가 되는 과정에는 꼭 있는 일이라고 위로했다. 오늘의 실패 경험을 어떻게 쓸지는 내 선택이라고. 다른 날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다면 시시하다고 본체만체했을 말이지만 그날은 귀에 쏘옥쏙 들어왔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다음날 그 친구가 카톡을 했다. 자기는 능력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고 자책했다. 어느 유튜버를 봤는데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심리학 개념을 자기보다 잘 말해서 자괴감이 들었다고. 바로 전날 지혜의 신처럼 내게 진리를 조언하던 그 양반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한껏 쪼그라든 그 친구에게 말했다. 어느 분야든 초심자일 때 가장 자신감이 폭발하고 중급자가 됐을 때 자신감이 확 꺾이는 경험을 한다고. 그렇게 실패들을 겪고 경험치를 쌓으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닥치라고 욕하며 껄껄댔다. 마음이 완전히 편해졌다.


실패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보기로 했다. 그동안 내게 실패는 약간 볼드모트 같은 거였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 출근길에 눈앞에서 마을버스를 놓쳤을 때도 "실패", 회사에서 말실수를 해서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도 "실패", 생각했던 것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도 "실패", 오늘 저녁에는 정말 술을 안 먹으려 했는데 결국 먹었을 때도 "실패". 그렇게 실패의 장벽을 계속 낮추기로 했다. 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경쾌하게. 내 실패들이 없던 일이 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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