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추억과 정의와 환락
죽어가는 사람 몸에 상처가 나도 그 상처는 어찌 되었든 아물게 된다. 비록 그 사람은 하루 안에 죽겠지만.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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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처는 언젠가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상처가 나서 인간이 죽는 게 아니라, 인간이 죽어서 상처가 낫지 않는다. 심장에 총알을 맞아도 가만히 두면 언젠가는 뚫린 구멍에 새살이 돋고 점막이 채워질 것이다.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서, 인간의 몸이 물 없는 선인장 같은 게 되어 죽어버릴 뿐이지. 재미있는 문장이다. 신체는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저 인간의 몸 전체가 그 치유를 기다릴 만큼 끈질기지 못하다는 것. 살아만 있으면 상처는 아문다. 흉이 짙게 남아도 상처는 아문다.
오랜만에 출근을 하려니 이상한 기분이다. 지난 토요일에는 온 가족이 모여 신명 나게 놀았고 일요일에는 바둑글방 1기 멤버들을 보고 왔다. 월요일 꼭두새벽부터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홍콩과 마카오를 둘러보고 어제저녁 귀국했다. 정신이 없다. 지난 오일동안 돌아다녔던 여기저기에 뭐 하나씩 두고 온 것처럼 머리가 멍하다. 동생의 집에 이성 한 조각을 두고 오고, 연남동 2층 카페에 추억을 두고 오고, 홍콩에는 정의를, 마카오에는 환락을 두고 왔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를 세상이다. 홍콩과 한국의 평화가 낯설다. 중국이 사랑하는 새빨간 색깔은 날이 갈수록 무서워진다. 차라리 검은색으로 뒤덮였으면 좋겠다. 빨간색보다는 검은색이 낫다. 홍콩에서 민주 운동가들이 망명 나가 뚫린 구멍도 언젠가는 메워질 것이다. 그들한테 걸린 현상금만큼이나 멀끔하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활기와 전통을 뽐내던 홍콩은 이미 옛이야기다. 장국영과 양조위의 흔적은 슬쩍 둘러보는 것 정도로는 찾을 수 없고, 힘들게 살펴봐야 그나마 보인다. 작정하고 가려놓은 형편이다. 살아있으면 상처는 낫는다지만, 홍콩이 남아있는 대신 무엇이 죽어 사라진 것인지를 생각한다. 그 죽음들은 떠나서도 뚫린 상처를 치유하고 있을까. 새로운 육신을 입고 구멍 없는 몸으로 다른 세상을 보고 있을까. 홍콩에는 정의를 두고 왔다. 한국에서도 있으나마나 했던 것이라 별 미련이 없다.
홍콩의 기이한 평화를 오래 곱씹으며 출근한다. 종로 한복판, 매주 광화문의 시위소리가 들리는 나의 회사로.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외치는 집회가 지나가는 사거리로. 국군의 날 장갑차가 지나갔던 대로변으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광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