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이 날아오면 그 앞에서 봐
만세일계든 신풍이 불든 전쟁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입니다. 보란 듯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전쟁을 확대해 가는 것은 광기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닙니다. 전쟁을 일으킬 용기가 있다면, 일으키지 않을 지혜도 있을 터입니다.
이흥섭, <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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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걸려 골골대는 와중에 피난가방을 쌌다. 주말을 앞두고 갑자기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보수당이 정권을 잡으면 연례행사처럼 북한의 꼬리를 잡고 늘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무섭다. 나라 꼭대기에 앉은 사람의 머릿속을 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나 감쪽같은지 그게 사람인지 인형인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요금을 찍다가 기본료가 1500원인 것에 깜짝 놀라고 크리스마스케이크가 자연스레 9만 원이 넘어가는 것에 놀란다. 철거되는 독립운동가들의 흉상 뉴스 뒤로 들썩이는 빈대들이 있다. 내 나라가 여전히 살기 좋고 안전한 곳이라는 걸 알지만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재작년엔 이보다 더 평화로웠는데.
바에서 일할 때 대만에서 온 손님을 만난 적이 있다. 작년 12월이니 거의 일 년 전 일이다. 홍콩의 시위는 진압되었고, 민주홍콩은 세상에서 사라졌으며 다음 전쟁터는 대만이 될 거라고 말했다.
우리도 준비를 하고 있어. 너무 자명한 일이거든.
그때는 왜 그만치도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졌는지. 손님의 이름은 종이비행기였다. 대만의 인기 위스키가 침략자에게 핍박받아 쫓겨난 대만 소수 원주민 일족의 이름을 훔쳐 쓰고 있다고 말하던 종이비행기. 모든 걸 빼앗고 나서야 죽여 없앤 것을 미안해하듯 이름만 빼다 쓰는 꼴이 가증스럽다던 종이비행기. 그도 대만에 돌아가면 입대하게 될 거라고 했다. 세계의 뉴스가 조용해지면 의심을 멈추지 말라던 종이비행기의 칵테일은 블랙 러시안이었다. 새까만 암흑을 상징하는 구소련의 술.
전쟁은 득과 실이 분명한 생물이다. 어딘가는 이익을 얻고 어느 쪽은 철저하게 짓밟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절멸을 바라는 건 가늠할 수 있는 계산이다.(인간이라면 그래선 안되지만서도) 그런데 지금 나라 꼭대기에 앉은 사람의 머릿속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 득이고 무엇이 실인지, 붙어버린 불은 어떻게 끌건지, 무슨 생각으로 쏘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용기며 지혜는 무슨, 사람인지 인형인지도 모를 것이 나라의 꼭대기에 있다. 용기도 없고 지혜도 없다. 허우적거리는 K 컬처의 아이돌, 드라마, 한류의 껍데기만 있다. 그러니까 감기에 걸린 채로 12층짜리 다이소에 가서 생존가방이나 싸게 되는 것이다. 뭘 챙겨 넣어야 그나마 마음이 놓일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하면서.
전쟁이 나면 아빠랑 면천의 1100년 된 은행나무 앞에서 보기로 했다. 지금도 속이 훤히 보여 힘겹게 뻗어있는 이 나무가 한번 더 전쟁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용기도 지혜도 없는 주제에 멍청함은 가득 찬 정권이라니, 힘이 있는 멍청함은 광기와 다를 바가 없구나. 예산이 대폭 깎인 독서지원 사업들과 일제강점기처럼 활동지원사들의 비리를 잡아대고 있다던 동생의 장애인 센터가 생각난다. 뇌도 없는 것이 살아 움직인다. 구물구물 기어가며 대들보를 무너뜨리고 해충을 뿌린다.
전쟁이 나면,
우리는 1100년 된 은행나무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