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살면서 처음으로 유화를 그렸다. 그것도 두 점이나. 게다가 전시회도 했다. 몸이 지쳤으나 충분히 쉬어지지 않을 때, 이유를 모르겠는 우울이 찾아올 때, 또 그와 비슷한 상황일 때 내가 그린 그림을 본다. 잠시 기쁘다. 그 기쁨은 휴식이 되고 활기가 된다.
내가 어쩌다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마침 점심때라 밥을 먹고 밖에서 어슬렁거리던 중이었다. 가로수 두 그루 사이에 걸려 나부끼는 플래카드에 적힌 안내문을 보았다. 경기도에서는 평생 배움 대학 GCC라는 평생교육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경기도 내 여섯 곳의 캠퍼스에서 취미에서 실용교육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도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서 관심이 갔다.
패션, 푸드, 공연, 만화 창작, 미술 교양 이렇게 다섯 분야 중 하나에 지원할 수 있었다. 입학원서를 쓰고 합격 여부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입학, 원서라는 단어를 들으니 설렜다. 나는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나의 스토리’라는 부제에 이끌려 만화 창작 과정에 원서를 냈다. 선착순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입학원서에 변별력이 큰 요소가 없어 보여 지원할 수 있는 시간에 알람을 맞춰 놓고 되도록 앞줄에 서도록 애썼다. 결과를 기다리면서 기대감이 더욱 커졌고 그만큼 합격을 못하게 될까 봐 불안했다.
합격을 축하한다는 문자를 받고 정말 기뻤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엄청 자랑질하는 사이에 입학식 날이 되었다. 그날 아침 남편은 학교 가는 나를 불러 세워 사진을 찍어주며 격려했다. 이 사진은 나중에 내 첫 번째 유화의 모티프가 되었다.
수업 안내문을 보면 6차시 36시간의 그림 수업 중 절반은 선 사용부터 정물, 풍경, 인체 드로잉을 배우고 나머지 3차시 동안 그리기 실습을 한다고 되어 있었다. 당연히 선 긋는 연습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첫 수업에 갔다. 출석을 부르고 선생님이 ‘유화 그리실 분?’해서 냉큼 손을 들었다. 그런데 오전에 간단한 이론 수업을 하고 오후부터 그림을 바로 그린다고 하여 당황스러웠다.
점심을 먹으며 새 친구들을 사귀었다. 오후에 드로잉실이라고 적힌 강의실에서 스케치북, 연필, 지우개, 캔버스, 물감, 이젤을 받았다. 이젤은 조립식이었는데 어떻게 조립하는지 몰라 좀 헤맸지만 옆자리에 앉은 분이 도와주어서 잘 펼쳤다. 참 신기한 일이 교실에서 처음 앉은 자리가 내 자리가 되는 일이 많은데 옆 사람도 그런지 우리는 그림 그리는 며칠 동안 내내 짝꿍이 되었다. 스케치용 연필을 깎는데 그게 뭐라고 신이 났다.
빈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려야 했을 때 정말 막막했다. 캔버스가 낯설고 부담스러워서 스케치북을 펼치고 연습을 먼저 해 보았다. 인물은 비례가 안 맞아 자꾸 뚱뚱하게 그려졌다. 내 계획으로는 인물이 뚱뚱하면 안 되었다.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하면 되겠지 싶어 호기롭게 지원했는데 유화 물감 근처에도 못 가 보고 끝인가 싶어 실망이 아주 컸다.
선을 긋고 지우기만 반복하다 보니 발아래에 지우개 때가 각질처럼 쌓이고 캔버스 표면의 섬유가 들고일어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나 보다. 선생님이 지나가다 왜요? 하면서 내 스케치를 들여다보았다.
잘하고 계시는데요.
자꾸 뚱뚱하게 그려지네요.
아, 그러면 선으로 나누어 부분 부분 그려 보세요.
뭔 말인지 알겠다. 격자를 그리듯 전체를 나누고 한 칸 한 칸에 집중해 밑그림을 그려나갔더니 그럴듯하게 비례가 맞게 고쳐졌다. 대단한 선생님이시네.
결국 나는 당이 떨어져 밑그림을 다 못 그렸다. 집으로 캔버스를 가지고 와서 어찌어찌 그리다 실망하다 하면서 밑그림을 그렸다. 캔버스에는 주저흔 같은 연필선이 어지러웠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고 더는 할 수가 없어서 포기한 채로 두 번째 수업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선생님은 밑그림을 보고 아주 잘하셨네 했다. 역시 칭찬은 힘이 나게 한다. 선생님은 기초 드로잉 수업 대신 칭찬을 많이 하기로 계획을 바꾸신 듯하다. 유화 물감 다루는 법은 가르쳐 주겠지 했는데 역시 과감하게 건너뛰고 그냥 칠해 보라 한다. 미리 유튜브로 이것저것 보고 오길 잘했다 싶었다. 사실 내가 시청한 것은 ‘이렇게 배우는 그림은 독이 된다, 당신은 창작형인가 관찰형인가,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같은 정신 무장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
사흘을 고민한 끝에 구입한 일곱 개들이 세트에서 붓 하나를 고르고 또 골라 들고, 하늘색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물감 튜브를 집어 팔레트에 짰다. 길고 긴 망설임 끝에 드디어 천연모 중간 크기 붓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하늘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첫 번째 터치는 아주 둔탁한 퍼런색이었다. 칠할수록 둔해지는 색감에 한숨이 나오려고 할 때 선생님 등장. 괜찮아요, 다시 칠하면 돼요.
좋아질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흰색과 더 밝은 파란색을 섞어 칠하다 보니 물감을 섞는 묘미를 알게 되었다. 유화의 매력이 색을 만들고 표현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재미가 났다. 선생님이 그림은 본인이 재미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그럼 나는 아주 잘하고 있는 셈이다. 정말 정말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드레날린이 너무 나와서 흥분되고 손이 떨리고 땀이 났다.
선생님은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마디씩 했다. 어둠은 더 어둡게 표현해야 밝음이 잘 드러난다. 색의 상대성. 이런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옆 사람과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선생님에게 뭔가를 질문하고, 스케치북 위를 연필이 슥슥 지나가고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하는 소리들이 모두 소거되는 어느 순간이 있다. 그리는 행위에 열중하여 숨조차 가만가만 쉬는 듯한 그 느낌이 정말 좋았다.
열심히 물감을 섞고 칠하다 잠시 뒤로 물러나 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 나서 내가 그린 것이 맞나 싶었다. 아무튼 나쁘지 않았다. 이론 수업에서 일루전이 어떻고 했는데 그것이 이것인가 싶기도 했다. 실제와 다르게 느끼는 착각이 신기했다. 마술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첫 그림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