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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sophers needlework Jul 20. 2023

내년 여름, 거기서 만나

- 언니의 그림이 세상과 만나고 있다

 건축은 사상이다. 어떤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갔으면 좋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그 생각을 공간으로 구현하는 것이 건축인 것 같다. 당연한 생각이지만《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다 보니 건축은 건물이 남쪽을 바라보도록 하며 대문을 동쪽으로 내는 문제를 넘어서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고 1000미터가 넘는 고요한 숲에서, 새벽녘의 정적을 맨 처음 깨는 것은 선생님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새들의 울음소리다. 오색딱다구리, 제주밀화부리, 큰유리새, 검은지빠귀, 황금새……. 머릿속에 새 이름이 스쳐간다. 울음소리는 기억하지만, 도저히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새도 있다. 

 해가 뜨기 얼마 전부터 하늘은 신비한 푸른 빛을 띠며, 모든 것을 삼킨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 순식간에 숲의 윤곽이 떠오른다. 일출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아침은 싱겁게 밝아온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뎃마당에 면한 작은 유리창 블라인드를 올린다. 안개다. 어느 틈에 어디에서 솟구쳤는지 하얀 덩어리가 계수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움직인다. 조용했다. 새도 포기하고 지저귐을 그만두었나 보다. 유리창을 열고 코를 멀리 밀 듯이 얼굴을 내밀고 안개 냄새를 맡는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하얀색이 아니라 초록색일 것이다. 옆의 설계실 블라인드를 소리 나지 않게 올린다. 좌우로 넓게 퍼진 남향창 가득히 안개가 흐르고 있다. 가운뎃마당에 있는 큰 계수나무가 안개 속에 가라앉고, 안개 속에 떠 있다. 선생님은 이런 숲속을 산책하는 걸까. 길을 잃지는 않으실까.

 안개는 아무리 깊어도, 해가 뜨면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새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지저귀기 시작한다. - 9, 10쪽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글, 김춘미 옮김, 비채 펴냄, 2016)》라는 소설의 시작 부분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를 말하자면 마장도서관의 ‘책 예감(책으로 만나는 예술 감성): 23 프로젝트’ 수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술 작품을 매개로 글을 쓰는 8차시 수업 중 마지막 수업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하나를 골라 오는 것이 숙제였다. 그림을 고르려고 하니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좋아한다고 생각한 그림이 많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 때문에 고르기가 어려워졌다. 왜 좋아하는지 촘촘하게 따지다 보니 딱 짚어 말할 수가 없어서 설명할 수 있는 그림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예상대로 수업에서 선생님은 그림을 왜 선택했는지 이유를 말해 보라 했다. 수강생들 사이에서 사전에 그런 언급 없었다고 가볍게 항의가 들어왔다. 선정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 그림을 고르는 기준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인 것 같다. 나와 비슷한 고민들을 하였구나. 항의는 해 놓고 다들 발표를 참 잘하였다. 자신이 골라 소개한 그림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선택한 그림 중에서 글을 써야 했다.      


 나는 언니가 그린 그림을 내놓았다. 그림을 배경지식 없이 소개하고 사람들이 어떤 감흥을 느끼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먼저 그 그림으로 글을 쓰실 분이 있느냐고 확인을 하였다. 선생님과 수강생 두 명이 그 그림을 보고 글을 쓸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글을 다 쓴 후에 선정 이유를 설명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정말 진지하게 글을 썼다. 마지막 수업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이 오래 품고 있던 그림에 대한 예의를 차려야 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펜이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는 소리, 연필로 쓰면서 지우개로 지워 고치느라 새까맣게 흩어져 있는 지우개 똥, 조심스러운 기침 소리. 나는 잘 안 써져서 주위를 둘러보다 순간 그 열심에 감동했다.      


<내년 여름, 거기서 만나>  oil on canavs 

  다들 이유가 궁금했는지 글쓰기를 마치자마자 내 이야기를 재촉했다. 나는 ‘그림은 나의 언니가 그렸다. 언니는 애정하던 그림을 그만두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우리(나와 남편 그리고 딸)는 언니의 열정을 되살리고자 그림을 팔아보기로 하였다. 그림은 자선경매에서 제법 치열한 경쟁 끝에 상당한 가격에 팔렸다. 그림의 제목은 <내년 여름, 거기서 만나>이다.’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듣던 한 수강생(김)이 ‘그럼 내가 제대로 그림을 읽었네요…….’했다. 김은 그림을 보는 순간 옛친구와의 약속을 떠올렸다고 했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스무 살이 되면 청주백화점 옆 패스트푸드점 앞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나가지를 못했다고 했다. 약속을 못 지킨 것이 그 친구에게 늘 미안했다고도 했다. 그 친구는 시골에서 유학 와 외로워하던 김에게 아주 친절했다고 했다. 김과 나눠 먹으려고 도시락을 2인분씩 싸 오던 친구를 기억하며 잠시 말을 멈추기도 했다. 잠깐 동안 교실 전체가 김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갔다. 김은 두 번째 스무 살도 지나버렸으니 세 번째 스무 살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곳에 꼭 나가려고 한다, 청주백화점 옆에서 친구를 만나 행복했던 그 시간에다 미래까지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약속이 꼭 이루어지기를 빌었다.     


 강사 선생님은 <내년 여름, 거기서 만나>를 보는 순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생각났다고 했다. 아마 애신 애기씨와 유진초이가 마주친 다리 장면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내년 여름, 거기서 만나>를 고른 또 한 명의 수강생(최)은 녹음이 짙어 어두운 숲속 계곡을 보며 마쓰에이 마사시의《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소설을 떠올렸다고 했다. 초록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온통 초록 일색인 이 그림을 골랐다고 했다. 그림을 사고 싶다고도 하였다. 이미 팔렸다는 말에 안타까워하였다. 화가 언니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시라 전해달라 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여름 동안 운영하는 숲속 건축사무소에서의 나날들을 그린 소설이다. 유명 건축가들의 건물과 그에 담긴 사상들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건축학 개론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정교하게 쓰였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기타아사마 아오쿠리 마을은 도쿄에서 신간센으로 약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일본의 인기 피서지 중 하나라고 한다. 활화산인 아사마산 경사면에 위치하며 1000미터 내외의 고원지대에 자리 잡아 여름 평균 기온이 20도 정도라고 하니 피서지로서의 요건이 충분한 셈이다. 전체 토지의 75퍼센트 이상이 임야라서 초록이 가득하다. 이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책을 읽다 보니 소설에 묘사된 별장 지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숲속 공기가 맡아지는 것처럼 신선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느꼈다. 언니의 그림을 보고 최가 이 책을 떠올린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너무나 기쁜 성과다. 그림을 보고 글을 쓰고 싶다고 한 사람이 10명 중 세 명이나 되었다. 그림을 보고 떠올린 경험을 나누었다. 그 이야기들은 지난날을 돌이켜 기억의 우물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게 했다. 그가 읽은 책을 나 또한 읽었다. 언니도《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이렇게 연결되는 인과 연이 신기하고 놀랍다.    


 언니의 그림이 이렇게 세상과 만나고 있다. 그것이 나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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