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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sophers needlework Mar 26. 2024

가족 북클럽

-《한 글자 사전》을 읽고

 요새 좀 재미난 일이 있다. 내 평생소원이던 가족 독서 모임을 하게 되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하다. 다만 다른 바람들도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죽음을 유예할 생각이다.     

 딸이 우연히 어떤 책의 문장이 필요하다고 찾아달래서 보게 된 책인데 정말 재미가 있다. 잠깐 보았는데도 제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더군다나 문장과 그 의미까지 이해하고 있어서 내심 기특하고 놀랐다. 딸은 책하고 백만 광년쯤 떨어져 살고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매우 나쁠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보면 좀 곤란하다. 자고로 인간이란 사실을 말하면 더 아파한다.     

《한 글자 사전(김소연 글, 마음산책 펴냄)》은 장르를 딱 정해서 말하기 어려운 책이다. 시와 산문, 시 같지 않은 시, 산문 같지 않은 산문, 시 같은 산문, 산문 같은 시, 가끔 다른 작품에서 인용한 것, 들이 실려있다. 자신의 언어로 새로이 자아낸 글을 싣지 않고 자신 혹은 다른 이의 작품에서 가져와 그 공간을 채운 글들을 보면서 억지로 쥐어짜서 만들지는 않으리라는 결기, 혹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워둘 수는 없다는 과감한 소심함을 읽었다.  

 어떤 장르인지 딱 잡히지가 않아 도서분류기호를 보았다. 818로 시작한다. 810번대이니 한국문학에 속한다. 한국 도서 십진분류법에서 818을 찾았다. ‘르포르타주 및 기타: 인용구, 경구, 표어, 일화집, 수상록, 수기, 콩트 등’이라고 되어 있다. 도서관 사서분께 물어 ‘818에는 소설, 동화, 수필, 연설, 일기, 서간, 기행 등에 속하지 않고 똑 떨어지지 않는 기타 등등의 장르를 넣는 것 같다’는 설명을 들었다.     

 지은이가 자신을 설명하는 소개글에서 시인임을 맨 앞에 내세우고 있는 까닭으로 시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자신의 <시>라는 글에서 ‘1. 이미 아름다웠던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될 수 없고,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것이 기어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일. 2. 성긴 말로 건져지지 않는 진실과 말로 하면 바스라져버릴 비밀들을 문장으로 건사하는 일. 3. 언어를 배반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라고 썼다.《한 글자 사전》에 실린 글 모두에 해당된다.     

 그뿐만 아니라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재미를 주기도 하고, 주제가 그린 듯이 잘 떠오르므로 시의 영역에 가까운 것 맞다. 한 글자로 된 낱말들에 관한 것인데 명사도 있고 부사, 감탄사도 있다. <감>에서 <힝>까지 한글 자모순으로 수록되어서 정말 사전 같다. 시라고 하고 사전이라고도 하니 818로 분류되는 것이 적절했다. 다 읽고 나니 이 책은 ‘818’에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책 같았다.         


 딸이 찾아달라는 것은 <똥>이라는 시였다. 전문은 이렇다.          

 똥          

안에 갖고 있기도 싫고 밖에 두고 보기도 싫지만 내보내는 순간 쾌락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쓰는 말과 닮았다.           


 배설하듯 쏟아내던 자신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며 말이 왜 허무한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우연히 보게 된《한 글자 사전》을 기억해 내었나 보다. 이래저래 감탄한다. 아, 드디어 내 딸이 책을 읽기로 했나 보다. 그럼 이제부터 남편만 책의 세계로 인도하면 되는구나.      


 아래는 남편이 엄청 감명 깊어했던 글.          

 격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격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모든 걸 가진 자에게서보다 거의 가진 게 없는 자에게서 더 잘 목격할 수 있는 가치이고, 모든 걸 가진 자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유일한 가치이고, 거의 가진 게 없는 자가 유일하게 잃기 싫은 마지막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셋 모두 격하게 공감했던.          

 겉          

‘속’의 반대말이므로 다 보이는 세계에 관한 것. ‘속상’하다는 말은 있어도 ‘겉상’하다는 말은 없다. 말하지 않으면 몰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심이 ‘겉상’할 뿐인 경우도 있다. 속까지 상하지는 않은 적도 사실은 많다. ‘겉상했을 뿐이야’라는 표현도 두루 사용되면 좋겠다. 겉치레, 겉멋처럼 부정적인 뜻으로만 활용되는 ‘겉’의 세계의 연장선에서.  

             

촌철살인.          

 봉          

잡으면 좋지만 되기는 싫은 것.         


파안대소하게 하는.          

 소          

일도 하고 젖도 주고 살과 뼈도 주고 꼬리와 발까지 주고 가는 이에게 경은 왜 읽어주려 했을까.     


내가 좋아하는 나머지 모두.          

<감> ~~~~~~~~~~~~~~~~~~~~~~~~~~~~~~~~~~~~~~~~~~~~~~<힝>         


 우리는 책 전체를 다 보지 않은 채로 이 책을 뒤적여 마음 가는 대로 골라 같이 읽었다. 수수께끼 놀이도 하고 즉석에서 퀴즈를 내고 맞히기를 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본문만 읽어주고 나머지는 제목을 맞춰 보는 식으로. 우리가 먼저 한 글자 단어를 생각해 내고 그 단어가 책에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또 그 단어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서로 비교해 보았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본문만 읽고 무슨 단어인지 물어도 잘 맞혔다. 이것은 있을까 하는 한 글자 단어들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남편은 재미있어하며 핸드폰 메모장에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소연 작가는 이 사전을 완성하기 위해 한국어대사전을 끼고 살며 단어에 몰입했다. 남편은 우리 가족의 생활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자기 마음을 돌아보고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새기고, 딸이 하는 말에 더 열심히 귀 기울인다. 남편이 쓰는 글 제목은 “한두 글자 사전”이다. 항목이 50개나 되고 진행 중이다.          

 이 책을 읽는 이가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다다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김소연 작가의 소망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남편은 책의 세계로 아주 깊숙이 들어왔다. 또 하나의 소원이 이루어져 내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 나는 어서 소원을 찾아 목록을 길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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