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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sophers needlework Apr 02. 2024

동동주에게 미안하다

- 막걸리 이야기

 봄이 오면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색하게 뿌연 날들이 계속되었다. 모처럼 조금 맑은 날 남편과 함께 나섰다. 그날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기로 했다. 가다가 길이 없어지면 돌아오자는 마음으로 발길 가는 대로 길을 잡아 걸었다.

 논과 밭, 숲이 함께인 길을 걸어 내려가니 고속도로가 보였다. 토끼굴이라 불리는 도로 아래쪽 통행로를 통과하자 알던 곳이 나왔다. 낯선 길을 한낮 봄볕 아래 걸어서 그런지 약간 피로해졌다. 마침 그곳에는 통영 굴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홀로 있다. 그다지 당기지는 않았지만 점심때이기도 하고 다리도 쉬자 싶어 식당에 들어갔다. 혹시 막걸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동동주가 있다고 한다. 막걸리를 마시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동동주를 주문했다. 갈증이 났어도 동동주를 맛나게 한 잔 하려고 물을 안 마시고 참았다. 우리는 막걸리 이야기를 안주 삼아 동동주를 마셨다.      


 동동주와 막걸리는 재료와 만드는 방법이 같다. 동동주는 술이 다 익기 전에 둥둥 뜬 밥알을 술 윗부분과 함께 건져낸 술로 막걸리에 비해 조금 더 맑은 편이다. 얼른 보면 식혜랑 비슷하다. 발효 중에 있어서 단맛이 더 나고 알코올 도수도 낮다고 한다. 동동주를 떠낸 나머지가 막걸리인데 탁해서 탁주라고도 한다.

 막걸리의 어원에는 ‘지금 막(금방) 거른 술’이라는 설, ‘마구(박하게) 거른 술’이라는 설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이러나저러나 막걸리가 오래되고 서민적인 우리나라 전통 술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쌀 생산량이 적던 시절에는 밀가루로 만들었다. 지금은 대부분 쌀로 만든다. 밤이나 잣과 같은 견과를 넣기도 하고 과일을 넣기도 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일반 막걸리가 최고다. 술을 일차로 떠내고 남은 지게미에 물을 섞어 거칠게 걸러냈다는 이름처럼 값싸고 만만한 술이다. 마트에서 한 병에 이천 원 안팎, 식당에서는 오륙천 원 한다. 안주도 고급스러운 것보다는 소박한 것들이 잘 어울린다.

 막걸리는 시골 점방 평상에 한쪽 다리만 걸치고 앉아 먹는 것이 참맛이다. 평상에는 비닐 장판을 야무지게 덮어 놓는다. 햇볕을 받아 녹진녹진해진 평상 한 구석, 한 뼘의 그늘에 엉덩이를 붙인다. 손을 짚을라치면 그늘 밖으로 나가며 쩍 달라붙는다. ‘아이고, 뜨거라!’ 하며 손을 거둔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이 빠진 사발이나 국그릇에 따라 엄지손가락을 담그며 마신다. 주전자째 독에 담가 술을 퍼 오므로 주변으로 막걸리가 줄줄 흐른다. 플라스틱병에 담긴 막걸리를 따를 때는  먼저 공들여 흔든다. 뚜껑을 딸 때 치익 하고 가스가 빠지며 술이 새어 나온다. 술 한 방울도 아까워 술잔을 받치고 뚜껑을 연다. 냄새나고 끈적거리지만 이상하게 용서가 된다.  

 막걸리는 목이 마르고 출출할 때 더 맛있다. 마른 입술과 혀를 적시고 목구멍을 타고 빈 속으로 들어가면 어깨가 저릿저릿하면서 지친 심신이 사르르 녹아난다. 이 첫 잔은 단숨에 비우는 맛이다. ‘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첫 잔을 들이켜고 입술을 훔치고 나면 정신이 좀 든다.  

 시골 점방에는 별다른 안줏거리가 없다. 점방 주인은 열무김치를 대접에 담아 짝이 맞지 않는 쇠젓가락을 꽂아 내온다. 김치에는 확에서 대충 갈아 큼지막한 붉은 생고추가 간간이 붙어 있을 뿐 양념이 거의 묻어 있지 않다. 곰삭아 갈색을 띠는 김치는 시금털털하다. 냉장고에는 들어간 본 적이 없는 모양새다. 그래도 우물에 잠겨 있었는지 시원하다. 김치를 우물우물 씹으며 두 번째 잔을 채운다. 시큼한 맛이 막걸리와는 오묘하게 어울려 자꾸 손이 간다.

 대접이 비어갈 때쯤 주인장이 김치를 통째 가져온다. 바닥에 몇 안 남은 열무 가닥을 싹싹 긁어 대접에 담고 김칫국물까지 부어준다. 막걸리를 한 되 더 시킨다. 잔을 비우는 속도는 조금씩 느려진다. 탁주답게 잔 바닥에 가라앉은 술은 새끼손가락을 넣어 휘이 젓고 쪽 빨아먹은 뒤 한 모금 마신다. 남아 있는 술과 안주의 양을 가늠하며 한 모금 한 젓가락을 신중하게 계산한다. 젓가락에 묻은 김칫국물을 핥아먹고서는 그 젓가락으로 막걸리를 젓는다. 이때는 젓가락 한 짝으로만 저어야 한다.

 어느새 그늘은 평상을 다 덮고 대신 내가 불콰해진다. 갈증이 가시고 배도 부르다. 콩알만 하던 간이 커지고 세상이 작아 보인다.      


 밥을 먹는 동안 막걸리 이야기는 안주도 되고 반찬도 되고 그리움도, 용기도 되었다. 동동주에게는 좀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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