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 대한 고찰
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나. 그런 카페인 중독자인 나를 위해서, 요즘 나는 커피를 담는 용기로 스타벅스 텀블러(아마도 400ml 정도)를 사용하고 있다.
나는 현재 커피의 도시 호주 멜버른에서 지내고 있다. 멜버른에서는 모두들 작은 용량의 커피 전용 텀블러(텀블러라기보다 reusable cup이 더 옳은 표현이 되겠다)를 사용한다. 처음 그 작은 컵을 보았을 때 나의 솔직한 감상은 '왜 저렇게 작은 컵을 사용하는 거야? 한 모금이나 마시겠어?'였다. 왜냐면 나는 한국의 많은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제공하는 'tall' 혹은 'Grande'(가끔은 'venti'까지) 사이즈의 커피에 익숙한 'heavy coffee drinker' 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커피용 위장(?)이 컸던 것만은 아니다. 고3 야자시간에 친구들과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혹은 작은 컵에 타서 마시며 평범한 용량의 커피를 마셨다. 그 후 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동기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러 갈 때에도 내가 주문하는 커피의 사이즈는 항상 'small'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커피의 노예가 되었고, 'small'사이즈는 'tall'로 'tall'사이즈는 'grande'로 진화되었고,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를 받는 날에는 어김없이 'venti' 사이즈의 커피를 주문했다.
그랬던 내가 멜버른에 와서는 반강제적으로 작은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작은 사이즈가 불만족스러울 정도로 작게 여겨졌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느덧 그 작은 사이즈에 익숙해지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커피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그와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큰 용량의 텀블러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텀블러는 현재 집에서 내린 커피를 담아서 마시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용량이 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많은 양의 커피를 담게 된다. 커피를 많이 담으려면 많은 양의 원두가 피요하다. 결국 나는 큰 사이즈의 텀블러를 사용하고 있는 덕분에 더 많은 원두를 소비하고 있는 꼴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많은 커피가 필요하느냐고 자신에게 되물어 본다면, 그렇지도 않다. 이 것이 문제다. 그냥 용량이 크니깐 많이 담고, 많이 담겨 있으니깐 많이 마시게 된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자본주의'라는 것에 대해 뜬금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큰 텀블러를 사용한다는 이유 만으로 무심결에 더 많은 커피를 마시고, 더 많은 원두를 소비하듯이, 이런 식으로 필요하지 않음에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더 구매하고 더 소비하면서 우리의 삶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사람은 기계가 아니므로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 대해서 최소한의 '성찰'은 해보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닐까?왜냐면 우리중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인생을 보내고, 돈을 벌고, 그 돈을 소비하고 있는 중이니까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11개월간 멜버른에서 잘 사용해오던 나의 텀블러가 자본가들이 설치해놓은 함정같이 느껴지면서 미워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멜버른의 많은 커피 애호가들처럼 작은 텀블러를 구매해서 사용해볼까 라는 생각을 했다. 또 시작되었다. 결국에는 또 다른 무언가를 구매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는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노예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