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희 Jan 12. 2022

청소 아줌마와 생선 아저씨

숫기 없던 나에게 엄마가 내린 최고 난이도의 과제 

구반포 아파트는 지금 생각하면 참 구식이고 낡았다. 74년 준공이면 우리가 12년 차에 이사 온 것이니 그리 늙은 아파트가 아님에도, 당시에는 다 그랬던 거라 감안해도 그랬다. 다용도실에는 까만 문이 있었는데 거기로 쓰레기를 버리면 1층 공용 쓰레기통으로 바로 추락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혁신적이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계단 청소하는 아줌마가 왔다. 빨간 다라이에 세제 푼 물을 담아 벽돌만한 나무솔로 계단을 한 칸 한 칸 좌우로 닦으며 내려갔다. 쪼그려서 일하시는 탓에 그 앞을 지나려면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그 옛날의 청소 아줌마. 

어느 날 엄마가 그랬다. "엄마 없을 때, 청소 아줌마가 와서 띵똥 하거든 문 열어드리고 다용도실에서 더운물 받아가시라고 해." "왜?" "아줌마 찬물로 청소하잖아. 1층 입구에 있는 그 호스에서 물 받아서. 찬물로 청소하니 얼마나 손 시리겠어. 들어와서 더운물 받아가시라고 해, 알았지?" 

하아, 엄마... 나는 친구가 놀러 오라는 집에도 잘 못 찾아가고 낯선 사람과 얘기하는 건 꿈도 못 꾸는 숫기가 없다 못해 말라붙은 아이인데... 아, 제발 아줌마는 엄마 있을 때 오시길.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측은지심 많은 엄마가 베푼 호의였다. 우리 집 물값은 쩔쩔매며 아끼는 한이 있어도 엄마는 남한테는, 특히 나보다 못한 사람한테는 관대한 사람이었다. 콩나물 값 백 원 이백 원은 고민해도, 걸인 앞을 지나갈 때는 고민의 시간이 그보다 짧았다. 명동 바닥을 기어 다니는 걸인에겐 나를 시켜서 단돈 백 원이라도 적선했다. 엄마는 그랬다. 자신보다 식구를 걱정하고, 생판 모르는 남들도 걱정하고 아꼈다. 


동아상회 골목을 들어오면 두어 칸쯤 지나 왼쪽이 32동이었다. 동아상회 골목으로 진입해 오른편, 그러니까 상가동 후문 맞은편에는 가끔 좌판이 섰다. 생선 파는 아저씨가 자주 오셨는데 생선을 널어놓은 좌판 옆에는 두껍게 쌓인 신문지 더미가 늘 놓여 있었다. 인쇄소에서 방금 나온 신문지 더비를 작두로 반듯하게 자른 듯한 신문지 더미. 마치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듯 한 장의 삐죽임이나 흐트러짐 하나 없는 그런 신문지 더미. 생선 아저씨는 손님이 고른 생선을 담아주거나, 생선을 손으로 들어 보여주고 나서는 어김없이 신문지 한 장을 젖은 손가락으로 '탁' 찍어 올려 손을 닦았다. '아, 기름기는 저렇게 닦는 건가 봐. 그런데 저 신문지 한 번도 안 만진 것처럼 되게 반듯하다. 신기해' 라고 생각했다. 

엄마도 순서를 기다려 원하는 생선을 사고는 나와 함께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용도실에서 주섬주섬 뭔가 챙겨서 나에게 건네줬다. "아까 그 생선 아저씨 주고 와." 쇼핑백에는 다 본 신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아저씨, 신문 보지도 않는데 다 사서 갖고 오는 거야. 그러니까 그거 갖다 드리고 와." 아, 엄마.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나 숫기 없어. 그냥 주고만 오는 것도 너무 부끄러워 싫어! 그런데 뭐 어쩔 수 있나. 그저 아무 일 없길 바라면서(여기서 아무 일이란 이 신문지는 뭐냐, 넌 누구냐, 나한테 이걸 왜 주냐 등 아저씨의 돌발 질문이 던져지거나 그 외의 상황 234가지) 다시 그 좌판으로 갔다. 아저씨는 열심히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고 나는 쭈뼛거리며 저, 이거요... 하고 쇼핑백을 건넸다. 아저씨는 아, 예 감사합니다. 하고 받았다. 다행히도 그게 끝이었다. 정말 다행히도. 


얼마 전 언니들과의 단톡방에서 이 옛날 얘기를 처음 들려줬다. 작은 언니가 말했다. 와, 감동이다. 정말 멋진 엄마야! 

 

맞아. 엄만 참 멋진 엄마였어.       

작가의 이전글 이사오던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