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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sty 묘등 Apr 23. 2021

존재감을 찾으려 했던 나만의 특별한 방법

[도덕경 제6장] 도는 신비의 여인

도의 여성적 특성


이번 [도덕경 6장]은 남녀의 구분이 아닌 존재론적 이해로 ‘도’를 바라보려 한다.


계곡의 신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비의 여인.
여인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
끊길 듯하면서도 이어지고,
써도 써도 다할 줄을 모릅니다.
-39P-


''의 항존성, 수납성, 창조성, 생산성, 개방성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성성에 중심을 두어 ‘도’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모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생산성에 기인한 항존성과 무궁성에 빗대어 ‘도’의 특징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도덕경]의 의도는 공감한다.


하지만 [도덕경] 6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의 생산성, 항존성, 무궁성임을 충분히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덕경 6장]이 유쾌하게 읽히지 않는다.


6장을 읽으며 유독 '여성', '여인'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꽂힌다. ''의 항존성, 생산성, 무궁성의 관점을 '여성'이라는 테두리에 가둬 규정하려 함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도'는 존재의 근원이고 세상의 본모습 그대로라고 [도덕경]에서는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도'의 여성적 측면만을 부각하는 것은 다소 낯설다. 과연 항존성, 수납성, 창조성, 생산성, 개방성이 여성성을 대변하는 것일까? '여성성으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라 ‘도’의 특징을 그냥 그러함으로 해석하면 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굳이 ‘도’의 특징을 설명할 때 여성성, 남성성을 전제로 두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 또한 학습된 성 역할, 성 개념일 수 있음을 점검해보았으면 한다.


[도덕경]에서 도를 여인, 특히 어머니로 상징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이런 뜻에서 나는 여성 운동가들이 [도덕경]을 여성 운동의 ‘성서’로 삼아도 좋으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장해 오고 있는 터인데, 여성 운동가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서양에서 활발히 거론되고 있는 ‘여성 신학’에서는 이제 신(神)을 ‘하느님 아버지’라 부르는 대신 ‘하느님 어머니(God the Mother)’로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와 어머니(God the Father and the Mother)’라 부르자는 주장도 있지만, 너무 길고 거추장스러우니까 둘 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한다면 ‘하느님 어머니’가 훨씬 좋다는 것이다.
-41p-  ([도덕경,] 현암사, 오강남 평역)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성이면 어떻고 남성이면 어떠랴? 그냥 하느님이라 하면 되지 굳이 어머니와 아버지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이는 단순히 편 가르기로만 느껴진다. 그저 ''의 항존성, 생산성 등을 '그러함'로 이해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여성과 남성의 구분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 했는지 내가 알고 있는 도덕경의 이념과 배치됨에 의아할 뿐이다.  


‘성(姓)’적 특성의 다름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대 성향으로 구별 지어 어느 하나를 우위에 둠으로 인해 표출되어진 갈등은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있다.

그래서 그런지 ‘도’의 여성적 측면을 이야기한 6장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너무 예민한 까닭일까? 비꼬아 생각해보면 [도덕경]에서 지양하라고 한 '구분 지음'과 '이분법적 사고'는 아닌지 냉철히 들여다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에 따라 이번 장에서는 애초에 역자의 취지(?)에서 비껴가 꼬투리 잡듯이 비판적 시각으로 정제 없는 나의 생각의 파편들을 두서없이 나열해본다.




“약한 것 같지만”의 반론


약한 것 같지만 끊어지는 일이 없고, 쓰면 줄거나 없어질 것 같지만 언제나 이어지고, 텅 빈 것 같지만 그곳에서 계속 뭔가를 생산해 내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 이런 ‘신비의 여인’보다 ‘도’의 항존성, 수납성, 창조성, 생산성, 개방성을 더 잘 상징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40P-   ([도덕경,] 현암사, 오강남 평역)


위의 40페이지 풀이 중 “약한 것 같지만”이라는 불편한 전제를 내포한 듯한 문구가 거슬린다.  

여기서의 ‘약함’의 기준은 지극히 단편적으로 물리적(신체적) 힘을 전제로 하기에 여자가 약하다는 보편성이 수용되지 않는다.


이 세상의 힘(능력)의 종류는 다양하다. 체력, 정신력, 사고력, 공감력, 창의력 등 말이다. 빈번하게 일컬어지는 여자의 약함은 그저 물리적 (능력) 만을 척도로 한 편협한 관념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다양한 힘 중 그저 단편적 힘일 뿐인 물리적 힘을 대표적 힘으로 일반화한 성급한 판단일 뿐이라고. 이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 주장하는 근거 중 동물보다 신체적 힘이 강함을 들이밀지는 않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분명 약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은 어느 시대든 존재해왔고, 그 역사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어떠한 형태로든 존속될 것임이 불안하게 예측되어진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신체적, 사회적 약자였던 여자에게 자행되는 폭력을 어쩔 수 없음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성姓을 떠나 그냥 같은 인간임을 동일 선상에 놓고 봤을 때 억울한 지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 또한 여자임에 구분되어진 불공정과 그에 따른 불편감을 한 때는 학습되고 왜곡되어 인지된 성역할에 의해 당연시했었고, 어떤 때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숙명으로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물리적, 신체적) 힘의 논리에 있어 여자들이 약자의 역사를 겪어왔다고, 여자가 약한 존재라는 가정 하에 ‘도’를 논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할 수 있다.


오히려 시야를 비틀어 확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굴곡진 성의 불평등 역사를 성적 대결로 귀결시킬 것이 아니라 ‘인류’ 아니 ‘존재’의 평등성의 관점으로 접근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성과 성이 첨예하게 대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어본다. 성의 구분뿐만 아니라 학연, 지연, 다수/소수 등의 이분법적인 관념에서 탈피하여 [도덕경]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존재’의 신비로움 만을 바라본다면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반대급부에 서있는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보면 내가 그렇듯 그들 나름대로의 불평, 불편감, 고통을 겪고 있음이 확인될 것이다. 그들의 삶에 대한 이해는 아니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받아들임에서 출발한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균형 잡힌 안정감을 찾아가리라 믿어본다.



여자였기에 변화할 수 있었던 나는 강하다?


6장의 풀이와 같이 ‘생산성’을 근간으로 한 ''특징을 이해해볼 때, '도'는 여자의 특징보다는 모성의 특징에 더 닮아있음을 느낀다.


역시 여자였기에 경험하고 변화할 수 있었던 강함의 체험을 그저 모성애에 기인함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나의 좁은 시선에서 비롯됐음알게 된다.


여성에게 부여된 출산 능력(10달 동안 배 속에 품고 산고의 고통을 견디며 한 생명체를 세상 밖으로 내어놓는 과정)에 기인해 생성될 수밖에 없는 엄마와 아이 사이의 정서적 관계의 초기 밀착성에 있어 경험의 유무로 판단할 때  ‘부성’ 보다는 ‘모성’이 우선시 됨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에 통상적으로 ‘부성애’보다는 ‘모성애’의 강함이 보다 부각되어 왔으리라.  


나 또한 내가 여자였기에 경험할 수 있었던 임신과 출산, 그리고 모유수유의 과정을 겪어내며, 자의든 타의든지 간에 나라는 인간이 나 이외의 다른 존재를 우선시 함으로 인해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나의 한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이타적 변화는 곧 내가 강해지고 있음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그 ‘모성’의 강함이 내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순간순간의 경험이 경이로웠다. 왜냐하면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성의 힘이 아니라면 결코 변화되지 않았을 나의 다양한 어떤 지점들이 낯선 모습으로 현실에서 목도됐을 때, 나는 나를 통해 ‘모성’의 강함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존재에게 기꺼이 나를 내어주면서, 나는 이를 당연히 모성애의 힘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살짝 비켜 생각해보면 모성애를 전제로 한 나의 이해도 어쩌면 편협한 성(姓)인지에서 기인사고였을 수 있알게 된다.



모성애라는 단정(斷定)의 맹점

‘엄마(여자)였기에’가 아닌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변화를 선택할 수 있음에 대한 강함


6장을 읽는 지금, ‘모성애’, ‘부성애’의 구분 지음이 성에 대한 이분법적 관념일 수 있음을 놓치고 있었던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학습되어진 모성이라는 무조건적인 동경의 틀 안에 갇혀있었음을 경계한다. 내가 느낀 나의 강함은 ‘모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존재를 위해 스스로의 변화를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보다 확대된 관점의 강함을 인지한다.

누구나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하에 자신보다 소중히 여길 존재를 만들고 그 존재를 통해 이타성을 발현할 기회를 가진다. 단지 나에게는 그 기회가 출산과 육아라는 형태로 찾아왔던 것이고, 그 기회를 통해 나보다 더 소중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처절하게 부여잡아 나라는 존재가 보다 성숙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변화하는 과정을 움켜쥐고 살아냈던 것이다.   

결국 나의 변화의 힘은 여자여서 경험할 수 있는 모성애가 아닌 한 인간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애씀의 힘이었던 것이다.




나는 여자,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찾으려 했다


웅~웅~ 푸쉬~푸쉬~

유축기의 움직임 소리가 한평 남짓 공간의 유축실을 가득 채운다.

휴대용이라 그런지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이 유축기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하다. 힘이 달리는 유축기를 도와 나의 한 손도 부족한 힘을 보탠다. 계속되는 마사지에 손가락 관절이 뻐근해온다.

그 와중에 작은 테이블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고 내 눈은 부지런히 책을 쫓고 있다.


출산휴가 3개월을 마치고 직장에 복귀했지만 모유수유를 결정한 나는 하루에 한두 번 회사 내  유축실에서 유축을 하며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 이 자격증은 이직을 하지 않는 이상 지금 나의 커리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격증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이직을 전혀 계획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부를 하고 있는 이유는 뜬금없을 수 있지만 나라는 인간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출산 후 ‘회사- 집- 회사- 집’을 오가며 회사 업무와 육아로 가득 찬 도돌이표 같은 일상에서 내가 없어져 버린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이미 희미해져 버린 내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00 회사 과장 ‘묘등(필명)’, 엄마 ‘묘등’은 있는데 인간 '묘등'은 보이지 않았다. 역할에 기댄 존재감이 아닌 그냥 인간 ‘묘등’으로서의 존재감을 어떻게든 찾아야겠다는 절박감이 나를 엄습해왔다. 그러던 중 찾은 존재감 확인 방법이 쓸모없을 자격증 취득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현실감 없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찾으려 할 만큼 절박하고 다급했었나 보다.


결국 나는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격증에 따끈따끈하게 새겨진 내 이름 석자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남들이 보면 쓸데없는 고생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한 자격증으로 나는 나의 존재감을 확인했고, 그렇게 나는 엄마라는 역할에 매몰될 뻔한 고비의 순간을 가까스로 넘겼다. 다소 맥락 없지만 나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나는 나 스스로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앞서 모성애의 강함이라 일컬었던 ‘이타성을 겸비한 인간으로서의 성숙’이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줄 정도의 힘은 아니었나 보다. 엄마로 다시 태어남에 대한 충만함 속에서도 설명하기 힘든 헛헛함이 순간순간 나를 엄습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나의 자아 찾기는 더 치열했고,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존재론적 혼란을 잠재웠다.

결국 인간의 강함이란 '모성애', '부성애'의 이름을 갖다 붙여 구분 지어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자아 성장(성찰)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나름의 방식을 통한 존재감의 곧추세움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깨달음이 스쳐간다.  나는 이렇게 '도'를 이해하며 6장을 마무리한다.              


 (타이틀 이미지 출처 : Pixabay, Joseph Redfield N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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