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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sty 묘등 May 02. 2021

드러나지 않게 묵묵하게?

[도덕경 제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는 삶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

나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43p-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영존시키는 길임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44P-


이번 장은 자기를 위한 사사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비우는 삶을 영위해 성인으로서의 삶에 다가가기를 인도하고 있다.

하지만 자기 PR 시대인 현대사회, 아니 밥벌이 전쟁터인 직장 내로 범위를 좁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정녕 현실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삶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 [도덕경 7장]의 의도와 결이 다를 수 있지만 '존재를 드러냄', '스스로를 앞세움', 즉 '쇼잉(showing)'의 필요성에 대한 단상의 꼬리를 잡고 나의 경험을 회상해본다.


사회 첫 발걸음, '드러내지 않음'을 선택하다.


2001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주체적 밥벌이의 첫발을 내딛는 설렘이 가득한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이 엄습한다.

내가 일하게 된 병원은 내가 졸업한 대학교 병원으로 학부 시절 실습한 병원이기도 하다. 즉, 나는  본교 출신 신입 간호사인 것이다. 그 당시 신입간호사들에게는 입사 3개월의 수습기간이 있고, 이 기간 동안 프리셉터라는 선배 간호사의 1:1 교육이 진행된다. 병원으로의 첫 출근 날 수간호사 선생님께서 프리셉터 선배를 소개해주신다. 나의 프리셉터 선배는 대학교 2년 직속 선배였다. 학교 선배라는 안도감을 만끽하기도 전에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 직감적으로 나를 긴장시킨다. 신입에 대한 호기심이라 하기에는 눈초리들이 곱지 않음에 당황하고 있던 차에 프리셉터 선배가 나를 조용한 곳으로 부른다.


"나는 나이나 경력으로 볼 때 최연소 프리셉터야. 내가 프리셉터가 된다는 얘기가 돌았을 때 많이 술렁거렸어. 내가 본교 출신이라 특혜를 받는 거라 생각하는 것 같고 그래서 너랑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거야. 우리를 주시할 거고 만약 실수나 잘못이라도 하게 되면 더 부풀러 지고 부각될 수 있어서 사실 나는 부담이 많이 돼.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경험하고 아는 거 너에게 다 가르쳐줄 테니 너도 잘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


우리를 향하고 있던 날카로운 시선의 이유는 분명해졌고, 그로 인한 나의 부담감은 배가되었다.

빠른 시간 내 업무를 숙달해야 하는 기본적인 신입간호사의 미션은 물론이거니와 우선 나에게는 조직 내의 나의 처세 방법에 대한 기준 확립이 시급했다.

근래에도 간호사 조직 내 소위 '태움'이라는 것이 있음을 기사를 통해 전해 듣고는 하지만 20여 년 전 그때도 그러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조준된 '태움'의 화살이 나를 향해 날아올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전략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인지되어야 하는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떤 행동과 태도를 보여하는지에 대한 선택이 중요했다.

며칠을 곰곰이 고민한 끝에 결정했다. 가능한 아니 적극적으로 튀거나 드러내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기로 한다. 워낙 말 많은 조직이다 보니 말로 문제 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할 것이 자명한지라 업무적으로 정말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실수하지 않도록 긴장의 촉을 바짝 세워 일하되 나의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고 묵묵하도록, 나라는 존재의 티(잘함의 티, 실수의 티 모두)가 눈에 띄지 않도록 수시로 나는 나의 행동을 점검했다.


다행히도 프리셉터 선배의 교육과 지도가 넘치도록 훌륭했기에 나는 빠른 시간 내에 업무를 습득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눈 앞의 것만 보는 단순 업무처리가 아닌 전체적인 상황을 읽고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는 업무에 대한 통찰력도 함양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입사 9개월이 넘어가면서 업무가 많아 기피되는 중증도가 높은 환자들이 나에게 배정되었고 그에 따라 신입 짐 덩어리가 아닌 조직 내에서 당당히 한 사람 이상의 역할하는 어엿한 간호사로 자리매김 해나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나만 잘하고 있는 태도는 눈꼴시림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인지한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담당하는 환자들 이외의 다른 분들의 루틴 업무를 내 환자 하는 김에 같이 묵묵히 말없이 해주었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나를 인정해달라는 목적성은 전혀 없었다. 그냥 내가 비난의 대상으로 눈에 띄지 않았으면 했을 뿐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말없이 일만 하는 나를 두고 말들이 돌았고 수습기간이 끝나고도 계속되었다.


"재는 왜 말이 없니? 우리랑 말 섞기 싫은 거야? 우리 무시하는 거야?"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나 내가 잘하고 있는지, 내 선택이 잘 한 선택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순간순간 들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밀고 나가기로 했고, 수습 기간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 대한 뒷담화가 잦아들고 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변화하고 있음이 동료 간호사들의 태도에 묻어났다.

나는 그냥 말없는 사람으로, 주변에 민폐 끼치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하는 그런 사람으로 인정되어졌다.

내가 식사하러 간 사이 내 담당 환자에게 발생한 응급상황은 동료 간호사들에 의해 기꺼이 수습되어 있었고, 나 대신 의사들과 다퉈주는 등 나에 대한 동료들의 배려의 색이 진해지고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자면, 인정받아 성공하고자 하는 신입의 치기 어린 포부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에서 '드러내지 않음'의 나의 선택은 적중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태움' 발생의 위기에서 무사히 탈출하였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음'을 미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경험에 기댄 '드러내지 않음'의 방법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통용될 거라 생각한 나의 판단이 성급했음을 깨닫게 된다. 병원 중환자실이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간호 업무라는 동일한 업무를 진행했기에 굳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상대적 비교가 이루어져 드러날 수밖에 없음에 대한 생리를 간과했던 것이다.


이후 직업과 환경, 상황들이 변화하면서 '자기를 드러냄', 즉 '쇼잉(showing)'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고, '드러냄'의 기술도 역량임을 인정하게 된다.


경쟁사회, 직장 내 존재감 확보를 위한 '드러냄'을 실천하다.


병원 퇴사 후 얼떨결에 제품 마케터(PM: Product Manager)로 제약회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업무의 특성상 전진 배치된 영업사원들이 내 담당 제품을 팔아주게끔 만드는 일이 주된 업무이다 보니 내 제품을 보여주고 어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야만 했다. '드러내지 않음'의 미덕이 통하지 않는 사회였다. 나라는 존재가, 내가 하고 있는 업무가 보여지지 않으면 당연히 내 제품은 팔리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이 회사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릴 것이 뻔했다.

그렇게 나는 '드러냄'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차츰 '드러냄'의 기술을 연습해나가게 된다. 워낙 내향적 성격이라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먹고살아야 하는 절박감 때문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하게 된다. 그래도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업무인지라 맡겨진 업무를 선제적이고 충실하게 하면 나라는 사람을 억지로 보여주지 않아도 됐기에 나름 즐기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나름 순수한 '드러냄'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억지스러움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담당하는 일이 전면에 나서는 업무가 아닌 지원적 성격이 강한 업무로 전환되면서 '드러냄'과 '쇼잉'에 대한 필요성이 절박감으로 가중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지원 업무의 성격상 나의 노력이 다른 사람의 공供으로 인정되어지는 경험을 할 때마다 느껴지는 허무함과 자괴감이 번갈아 가며 나의 자존감에 상처를 낸다. 그로 인해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의미를 상실하고 있을 때쯤 이렇게 하다가는 직장 내 나의 존재 가치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위기감억지스럽더라도 나라는 존재를, 나의 업무를 적극적으로 어필해보기로 시도한다. 이전에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라는 업무 중심의 '드러냄'을 해왔다면, 지금은 담당 업무뿐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업무 및 성과에 대해 홍보하는 '쇼잉'의 일을 의식적으로 추가하여 진행하게 된다. '쇼잉'의 피곤함이 가중되어 지쳐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들이 전혀 생산적이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이직을 단행한다. 내 눈에 애써 외면했던  '쇼잉'의 부정적 면모들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회생활, 조직생활의 시간이 더해질수록 자신이 한 일은 부풀리고, 남이 한 일도 내가 한 일로 둔갑시키는 지나친 '쇼잉', '보여주기 식 업무' 기술자들의 불순한 의도와 행동에 눈살 찌푸린 적이 더러 있었다. 빨리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수 있음을, 사내 정치에 밀려 억울한 처지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일 수 있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로 인한 피해자의 분노가 본인은 그러지 못했음에 대한 회한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씁쓸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경험을 하기도 했었다. 솔직히 피해자의 당사자가 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에 긴장하면서도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회의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의 머리 속을 비집고 나온다.

당시 적어도 나는 저렇게 변하지는 말아야지라고 다짐을 했던 그때의 나와, '쇼잉'의 피곤함에 지쳐있는 현재의 내가 겹쳐 보이면서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든 나에 대한 이질감이 낯설어 변화를 시도하기로 한 것이다.   


이직 이후 '드러냄'의 과정이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억지스러움은 덜어져 스스로에 대한 이질감이 희미해져 가면서 조금은 편안한 나로 돌아가게 된다. '드러냄'의 수위조절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확립되어가면서 적어도 억지스러운 '쇼잉'의 피곤함에 나의 정체성과 자존감이 공격받지 않게 된 것이다.


사회생활 22년 차 지금, '드러냄'을 요구하다.


2019년 사회생활 19년 차에 조직을 이끄는 임원이 된다. 한 조직을 책임지는 조직장이 되어보니 너무 바쁘다. 그 전에야 내가 맡은 업무만 잘하면 됐지만 이제는 내가 맡은 일만, 즉 나만 보면서 일을 하면 안 된다. 조직원들이 일을 마무리해줘야 나의 업무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더불어 조직원들 한 명 한 명을 봐주어야 하는 업무가 추가된다. 나름 세세하게 조직을 살피려고 하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드디어 "보고만 잘해도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말이 뼈저리게 공감되기 시작한다.

조직원들의 업무보고 마감일(Due date)은 정해져 있지만, 일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중간 과정들이 궁금하다. 조직원들이 마감일에 맞춰 완벽한 보고를 해주는 것보다 진행과정 중간중간에 진행사항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문제없이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해 나에게 보고된다면 당연히 나무랄 게 없겠지만, 최종 보고된 업무에 문제가 있거나 의사결정권자인 나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때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다.

결함이 없는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기대이다. 그저 일을 진행하는 과정 중 조직장에게 진행사항을 자발적으로 공유하고 같이 조율해가는 과정이 서로를 이해하고 업무 진행에 대한 안정감을 주는데 기여한다 믿는다. 또한 결과만으로는 추정하기 어려운, 과정 상에서 발생한 어려움과 노고의 가치가 있을 수 있는데, 이를 본인 입으로 말하는 것이 민망하다는 이유로 드러내지 않고 그냥 조직장이 알아줬으면 하는 기대는 충족되지 못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나는 조직원들에게 나의 인사평가 기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스스로 드러냄'을 요구했다. 드러내지 않음으로 인해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할 수 있음을, 그 억울함을 호소하더라도 이해받을 수는 있어도 인정되지 않을 수 있음에 대해 공표했다.

사회 초년생 때 '드러내지 않음'을 미덕으로 믿었던 내가 20여 년이 흐른 후 '드러냄'을 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사실 모두가 유사한 정도의 '드러냄'을 행한다면 평가에 대한 불공정은 덜할 것이라 생각된다. 문제는 '드러냄'의 불균형에 기인할 수 있다. '드러냄'을 수치스럽게 여겨 '스스로 드러냄'에 인색한 사람과 지나친 '드러냄'으로 본인의 업적을 과도하게 치장하는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간극이 평가자의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초코과자 CM송인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조직 내 경쟁 환경에서 통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더 많은 집중의 깊이와 시간의 양이 필요하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세상이 이상적일 수 있으나 직장 내에서는 현실적이라고 말하기가 애매하다. 공동체 생활보다는 개인 삶에 대한 가치에 집중하고 있는 요즘, 묵묵함의 미덕을 더 이상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세상은 사실이 아닌 인식의 게임이라 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사회에서 '드러냄'은 '소통'으로 읽힌다. 직장 내 인식 게임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수동적 자세가 아닌 '드러냄의 소통'에 대한 적극성이 요구되고 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다만 '드러냄'에 대한 수위조절은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로 여전히 남겨져있을 뿐이다.  

 



(타이틀 이미지 출처 : Pixabay, bigter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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