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을 뛰는 일교차에도 청명함을 한 껏 뽐내는 더없이 좋은 가을 날씨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다. 곧 들이닥칠 겨울에 조바심이 난 나는 매일 밤산책에 나선다. 산책 코스는 집 근처 우이천이다. 나의 추억이 박제된 이곳에서 나는 밤마다 35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한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선다. 아침부터 잔뜩 먹구름을 머금고 있더니 하늘이 토해낸 장대비가 하염없이 땅바닥을 때리고 있다. 집에서 챙겨 온 우산을 펼친다. 무거워 가져오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손에 들려준 우산을 보며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니다. 사실은 아주 많이 서운하다.
4년이 넘는 초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엄마는 비 오는 날 단 한 번도 우산을 들고 학교에 오신 적이 없다. 부모님이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계셔 영업시간에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다수의 경험에 의해 익숙할 만도 한데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는다. 섭섭한 마음이 아른아른 피어오른다.
이사를 한 지 얼마 안돼 집과 학교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전에는 가본 적 없는 낯선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내디뎌야 하는 발이 빗물을 흠뻑 머금었는지 그저 무겁기만 하다. 가뜩이나 낯선 하굣길인데, 비까지 오니 생경한 것은 가야 할 길 만은 아닌 듯하다.
우산을 짓누르며 내리는 빗물의 무게만큼 마음도 발걸음도 묵직하다. 추적추적 빗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버스를 타야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같고 싶지 않다.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간다면 도착 시간이 늦어질 것이다. 집에 가기 전 가게에 들러 엄마의 눈도장을 받아야 하는데 평소보다 늦어지는 나의 귀가로 엄마의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심통스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비틀어 나아간다. 우산을 받쳐 든 고개를 푹 누르며 도로를 걷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더니 바람까지 거세다. 우산 쓰는 것이 무용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젖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앞에 도착했다. ’콸~콸~‘한 물소리가 귀를 때리는데 갑자기 마음이 시원해진다.
우산을 접는다. 온몸을 건드리는 빗줄기가 찝찝했던 기분을 씻어 내린다. 채찍질하듯 내리 꽂히는 빗소리와 개천에서 몸을 불린 우렁찬 물소리로 가득 찬 이 순간이 짜릿하다. 어른들이 말하는 ‘자유’라는 것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면 바로 지금 내 몸을 흐르는 이 느낌일 것이다. 빗줄기는 여전하고 개천물은 속도를 더하는데 빗물에 한껏 불은 몸은 증발할 듯 가볍기만 하다. 춤을 추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물 웅덩이에서 참방참방 날뛰어본다. 복합적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생생한 감각들이 생동하며 나의 곳곳에 아로새겨진다.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느지막이 나타난 딸의 모습에 화보다 걱정이 앞섰던 엄마는 어떤 것도 물을 새 없이 더운물에 씻기고, 따뜻하게 덥힌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이고, 이불로 감싸 재웠다.
‘우이천’. 지금은 산책로와 공원으로 정비되어 지역 주민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지만, 그 당시 장마시기에 범람이 잦아 주변 가옥들을 물에 잠기게 하고, 물고기들을 도로로 내몰았던 고약스러움이 있는 장소였다.
자칫 위험할 수 있었던 비 오는 날의 뜬금없는 일탈이 무탈로 마무리되었기에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때 각인된 감각이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그 장소에 가면 꿈틀꿈틀 되살아난다.
한 시간 남짓 남편, 딸과 함께 그곳에서 산책을 즐긴다.
한없이 드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문득문득 그곳에서 추억의 비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