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나는 맞고 넌 틀릴까?
G 씨의 하루는 아침 다섯 시에 시작됩니다.
해가 뜨기도 전에 G 씨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직 잠들어 있는 가족들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입니다. 아이들은 한밤중이고, 어제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온 아내도 잠들어있습니다. 요즘 아내는 많이 피곤해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휴직했던 아내는 최근에 다시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간단하게 몸을 풀고, 아침 준비를 시작합니다. 오늘 아침은 미역국입니다. 시간이 없는 아내와 아이들이 국에 밥을 말아먹고 빨리 일상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메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혹시 잠에서 깰까, 조심조심 움직입니다. 소고기와 미역을 볶는 손이 차분합니다. 물을 넣을 때도 천천히 움직입니다. 국이 끓는 동안 전날 먹던 쌀죽을 꺼내 데우고, 그릇에 옮긴 후 후루룩 마시기 시작합니다. 그릇을 조용히 정리하고, 옷을 갖춰 입고는 집을 나섭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마 삼십 분은 더 잘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G 씨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내는 퇴근전이고, 아이들은 귀가 전입니다. 저녁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침에 해 놓은 미역국과 밥이 그대로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조금 손을 댄듯한 흔적만 남아 있는 미역국 앞에서 그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미역국의 흔적이 남은 대접 하나와, 자신이 먹은 쌀죽의 흔적이 남은 대접 하나가 개수대 안에 덩그러히 놓여 있습니다. 그는 냉장고에서 미리 양념을 해 놓은 불고기거리를 꺼냅니다. 야채를 넣고 센 불에 익혀 불고기를 완성해 놓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세탁기에 돌려놓습니다. 아이들과 아내가 도착하자, 저녁을 차리고 치우고, 빨래를 널자 골반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또 미역국이야? 하는 작은 아이의 말을 흘려들으려고 노력하지만 자꾸 가슴 한 구석이 찡하게 아파옵니다.
일은 식사를 마치고 큰아이와 이야기하다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는데, 조금 있으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큰아이의 희망 학과와 선택과목을 이야기하다가 그만 그는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문과를 간다니.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멍청하게.
하는 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너무 큰 소리로 나와버렸습니다. 스스로도 놀라버렸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자신을 빼고 나머지가 한 편이 되어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 같은 상황이 그를 더욱 극단으로 몰아갔습니다. 결국 가족의 대화는 큰소리로 끝나버렸습니다. G 씨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늘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자신의 말을 왜 들어주지 않을까요. 왜 다들 후회할 짓에 목을 매는 것일까요. 사회생활도 해 본 적 없는 다른 가족들은 왜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걸까요. 내일 다시 아이와 이야기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는 늦은 밤까지 소파에 누워 잠들지 못했습니다.
사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요새처럼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오히려 우리는 아이들의 생각을 따라잡기 힘들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부모님들이 뭐든지 다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맹목적인 믿음은 아이들이 10대가 되면서 깨지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우리 엄마는 혹은 아빠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때 필요한 것은 합리적인 대화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뭐든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아이들의 그런 표현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춘기의 치기라고 생각합니다. 중학생이 되면 아이들은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부모님이 모르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면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럼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앎이 아이들과의 합리적인 소통에 닿지 않을 뿐입니다. 사실 우리의 앎은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아마 G 씨는 아이가 문과를 간다는 이야기에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와서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강사로 떠돌다가 작은 출판사에 겨우 자리 잡은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의 큰아이는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큰아이가 선택한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네가 뭘 안다고 그래'라는 말로 아이와의 소통이 단절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자신이 점점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로 각인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 아이의 모습에서 우리가 화가 나는 까닭은 아이의 모습 안에 '나 자신'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H 씨는 아들이 결혼하겠다는 여자친구를 데려올 때부터 자신만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집 값은 비싸고,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사람도 많고, 금리도 올랐으니 아이들이 독립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요. 그래서 H 씨는 여러 차례 아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집에 들어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눈치 빠른 요즘 아이들이 잘 알아들었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신혼집을 얻어서 집에서 거리가 있는 곳으로 나갈 때도 아이들은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둘이 따로 살면서 낭비되는 돈이 얼마나 많은데, 둘이 살면서 헛되게 쓰는 비용도 얼마나 많은데. 자신이 곁에 있으면 막을 수도 있는 돈인데. 역시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동네 시장이나 마트에 갈 때마다 싸게 산 호박이며 버섯이며 식자재를 종종 가져다주어도 아이들은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다리가 아프게 일부러 싼 집을 찾아가서 배낭에 식재료를 담아 더운 여름날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시장에 다녀온다고 넌지시 이야기해도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주면 줄 수록 힘은 힘대로 들고 기분은 기분 대로 상하는 것을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요. 하지만 오늘도 그녀는 아들내외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반찬을 바리바리 싸고, 식재료를 준비하고 그녀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먼 거리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양은 손빨래 하고, 행군물은 두었다가 화장실 청소에 사용했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길에서 가져오고, 오래된 소파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불편했지만 남편을 설득해서 그냥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독하게 알뜰하게 살아서 서울 시내에 집 한 채 당당하게 갖게 된 것을 왜 아이들은 모를까요. 아이들 신혼집에 간 날이 생각났습니다. 화사한 벽지와 새로 산 가구며 쓰임이 짐작도 가지 않는 전자제품들이 들어선 집안을 둘러보며, 답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자신의 신혼살림이 떠올랐고, 임신한 상태로 시누이 밥을 해주러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 넘게 다녀와야 했던 자신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그녀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질투심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몰랐고, 자신의 은근한 분노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분노의 원인을 찾아야 했고, 그것이 결국에 가서는 씀씀이가 헤픈, 아니 그렇게 보이는 며느리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며느리는 불편한 기색이었습니다. 며느리를 앉혀 놓고, 한참을 우리는 꼭 한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직후에 더 그랬습니다. 같이 살기만 하면 아이들은 위층에, 우리는 일층에 살면서 절대 아는 척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데도 그랬습니다. 오늘따라 아들까지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은 아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사실 아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마음으로 진실을 덮어두고 그 원망을 며느리에게 돌렸습니다. 아들 내외가 집으로 돌 가기 직전, 아들의 말에 그녀의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이거하고 이거는 두고 갈게요. 집에서 밥을 잘 안 먹어서. 다음에는 물어보고 사요. 버리면 아깝잖아.
아주 문득, 오래전에 어떤 날이 떠올랐습니다. 시어머니가 작은 방에 온통 똥칠을 한 날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작은 방에서는 온통 배설물 냄새가 가득이었고, 사람도 못 알아보는 시어머니는 너무도 천진한 표정으로 똥이 뭍은 손을 들어 보였습니다. 헛구역질을 하며 화를 내며 울기도 하며 그것을 다 치우고 앉아 있는데, 방문을 닫고 들어앉은 아들이 생각났습니다. 아무도 나의 고생을, 아무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모두 저마다 저희들만 편한 세상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요양원을 왜 알아보지 않냐고 물어보던 동생의 말을 들었을 때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에 있는 욕과 세상에 없는 욕을 모두 입 밖으로 꺼내어 퍼 부워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말이 끝나는 순간, H 씨는 눈물과 욕을 쏟아 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쌍놈의 새끼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개 같은 놈의 새끼. 나쁜 새끼.
그 욕설은 아들은 향한 것이기도 하면서 며느리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남편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며느리의 머리채라도 잡고 싶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언제쯤 그녀의 마음을 알아줄까요. 왜 그녀가 옳고 며느리는 그르다는 것을 몰라주는 것일까요. 그녀의 분노가 향해야 할 것은 어디일까요?
사실 그녀의 분노가 향해야 하는 곳은 스스로입니다. 그녀는 일단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 분노가 자신의 열등감과 질투심에서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다 성장한 아이들에게 느끼는 분노는 대부분 그것들이니까요. 다만 열등감과 질투심 그리고 자신이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과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등이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것들을 동시에 인정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삶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따진다면 아마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부부조차 삶에 대한 태도가 다른 것을 보면 말이죠. 모두의 삶이 다른 것처럼, 우리 삶의 문제는 대부분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방식도 역시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아이들 에게는요. 아마 아이들은 시행착오를 하겠죠. 넘어지거나 좌절하기도 할 것이고요. 하지만 그것 자체로 의미 있다는 것을 왜 어른들은 모를까요.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내 삶이 과연 성공하고 행복한 삶인지를. 만약 행복한 삶이라면 내가 그동안 겪은 시행착오들이 나에게 어떤 순기능을 했는지를. 그리고 만약 행복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삶이라면 내가 지닌 분노나 열등감이 아이들의 삶을 해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세요.
사실 아주 많은 경우에, 우리는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적어도 지금의 우리보다는 늘 나은 길을 가고 있죠. 아이들이 지금 부모의 나이가 된다면 얼마나 더 큰 사람이 될까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았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전부인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 외에 다른 삶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이며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만약 같은 방식으로 넘어지더라도 우리와 아이들은 아주 다른 각도에서 그 상처를 바라볼 것입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옳습니다. 물론 그 자신들의 삶에서만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실은 어른들은 사실 자신이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옳지 않지만 옳게 보이고 싶은 것, 이것은 어쩌면 외부의 어떤 위협보다도 아이들을 더 아프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정하세요.
나는 내 삶이 옳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자신이 없으며 늘 수많은 번뇌에 쌓여있구나. 네가 옳을 지도 모르겠다. 너의 삶에서는. 나의 분노가 너의 마음을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염려가 너의 삶을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늘 사랑하지만, 늘 미안하구나.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옳고,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