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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May 19. 2023

바람직한 소통을 위한 성찰노트

여섯째, 나는 나를 무엇으로 정의할까?

H 씨는 최근 상담센터에 다녀온 뒤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시에서 제공해 주는 상담 지원 프로그램에, 너무 도움이 되었다는 아내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나갔습니다. 아내에게는 싫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지인 부부가 상담센터에 다녀와서 사이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한 번쯤은 자신도 상담을 받아보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의 아내가 먼저 시에서 제공하는 바우처로 상담을 몇 차례 받고 온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상담을 다녀왔을 때, 아내는 그렇게 만족스럽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다녀와서는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아내가 어느 날, 상담센터에 다녀온 아내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H 씨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도 그는 불필요한  말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짧게 이야기해도 동료나 부하직원들은 알아서 일을 처리하기도 했고, 그는 자신의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문득 생각해 보면 기분이 나쁘거나,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가 기분이 나쁘다고 표현해도 더 나아질 것이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웃는 표정으로 침묵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아프면서 침묵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정들도 무뎌졌습니다. 그냥 '다 그런 거지~'하고 넘어가다 보니 정말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너그럽거나, 원만하다는 주변의 평가도 크게 싫지 않았습니다. 집에서도 그는 화를 내거나 감정을 크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문득문득 화가 나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자 그는 묵묵히 아빠로서의 일을 수행할 뿐, 아이들과 충돌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늘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는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아내는 늘 하루의 일이나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고 그는 수용해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었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집에서도 꼭 필요한 말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아이들도, 아내도 그런 그의 모습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늘 부족하기 때문에 그는 사실 어디에 가나 환경 받는 편이었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하지만 상담센터에서의 이 첫 질문부터 대답에 막힌 것은 스스로도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도 기분이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꿈뻑꿈뻑,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선생님은 '다음에는 좀 나을 거예요'라고 말씀했지만, 결국 몇 마디 못하고 한 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차에 앉아 지금 내 기분을 말로 표현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집에 도착할 때까지 모호한 느낌만 있을 뿐, 내 기분을 말로 표현해 낼 수 없었습니다. 어떠냐고 물으며 쫓아오는 아내에게도 딱히 어떤 말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듣는 일에 익숙했습니다. 어머니는 지방에서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고, 얼마 안 있어 그가 태어났습니다. 서울이 고향이었던 아버지는 곧 서울로 발령을 받아 온 가족이 이사해야 했고, 어머니는 아주 젊은 나이에 연고 없는 서울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가 아주 아기일 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아이를 등에 업고 동네로 나갔습니다. 아는 사람이 정말 한 사람도 없었던 어머니는 목적 없이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 돌봐야 했습니다. 아이가 이유를 알 수 없이 울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녀는 아이를 안고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혼란과 자책감을 마음속 깊이 꾹꾹 눌러 담아야 했습니다. 이따금 시댁에 대한 서운한 것들도 그랬습니다. 남편은 하루종일 일하느라 바빴고,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아기를 눕혀 놓고 때때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아기가 성장하고 난 후에도 그녀에게는 자신의 아이가 가장 친한 친구처럼 생각되었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늘 털어놓았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한탄과 원망이 되어가는 것을 문득 알았지만 아이는 워낙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학교에 대한 이야기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아들은 말을 잘 듣고, 속 깊은 아들, 사춘기도 없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고 말을 잘 들어주는 착한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요즘 아이들에게 버릇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이야기할 줄만 알고 어른의 이야기를 들지 못하는. 그래서 우리는 과잉보호가 일반화된 육아환경을 탓합니다. 부족한 줄 모르고, 부모가 아이들의 말을 지나치게 잘 들어주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적 인격체로 성장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볼까요? 

이기적이고 남에 말을 잘 듣지 않고, 문제가 있는 아이들은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다만 다소 강압적인 지도방식 때문에 이런 기질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른들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이런 기질들이 학교에서 군대에서 사회에서 혹은 부부사이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어른들의 말은 잘 듣는 듯했는데, 친구나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는 소통이 되지 않거나 은근히 이기적인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분명히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듣는 척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H 씨는 사실 어머니의 말을 썩 귀담아듣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되기 시작한 때에 그의 어머니는 많이 힘든 상태였고, 그 넋두리를 사춘기의 아들에게 했습니다. 어머니의 감정이 제대로 배출되지 않으면 어머니는 때때로 심한 분노나 상당한 강도의 우울감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는 사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감정을 수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꽤 점잖고 사려심 깊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H 씨는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상황은 잘 알면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기분인지조차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H 씨는 다음 상담 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요?

R 씨는 요즘 자신의 인생을 찾는 중입니다. 아들 내외가 결혼 한 이후, R 씨는 열심히 음식을 해서 날랐습니다. 아들 내외가 오는 날에도 열심히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며느리가 집에 와서 자는 날에는 며느리의 빨래까지 손으로 해서 널어 주었습니다. 절대 며느리에게 생색을 내거나 부담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빨래를 보면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고, 늘 가족을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가족들의 소비에는 상관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소비에는 늘 엄격한 기준을 세워두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절약과 목표에는 늘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학원비를 위해 아꼈고,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요리했으며, 가족들이 혹시 밖에서 무시당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깨끗하게 세탁하고 부지런하게 다림질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결혼하고 난 후, R 씨의 일상은 무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내외를 위해 열심히 반찬을 만들고 노력했지만 아이들은 썩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나중에 아이를 낳을 때 입을 수 있도록 주변에서 깨끗한 아기옷을 얻었습니다. 깨끗하게 삶고 빨아서 차곡차곡 두었는데, 이도 역시 아이들은 반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긴 아들 내외는 결혼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늘 바쁘던 집안일의 양은 줄었고, 아무도 자신이 열심하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출근하지도 않으면서 늘 바쁘게 밖으로 돌았고,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기분을 이야기할 곳이라곤, 늘 바쁜 척하는 딸아이 밖에 없었습니다.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을 찾아. 옷도 좀 사 입고, 하고 싶던 일도 좀 하고.  


그러던 어느 날, R 씨의 푸념을 들어주던 딸이 한 마디 했습니다. 별 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는 동안 R 씨는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찾겠다고. 당장 시장에 가서 옷을 몇 벌 샀습니다. 옷에 어울리는 그럴듯한 구두도 샀습니다. 친구를 따라 산에 가려고 등산화며 등산바지도 샀습니다. 문화센터에 가서 수업도 신청했습니다. 시도 쓰고, 산에도 가고 자신의 인생을 금세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남편에게 산 옷이며 신발을 자랑했습니다. 문화센터에서 시창작 수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열심히 이야기했습니다. 남편은 소파에 앉은 채로 R 씨를 지긋하게 바라보더니 '잘했네' 한 마디를 하고는 이내 텔레비전 리모컨을 손에 쥡니다. R 씨는 기분이 상했지만 상관없습니다. 오늘은 그녀가 인생을 찾기로 한 첫날이니까요. 


하지만 인생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산에 가는 것은 즐거웠지만 너무 힘들고 고된 일이었습니다. 시도 열심히 적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상당한 시간을 끙끙거리며 내놓은 결과물을 본 남편이 한 바탕 웃어버린 후에는 더 그렇습니다. 아이들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파김치를 거의 다 먹었을 텐데 문화센터 다녀오는 길에 파를 좀 사 올까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사 오지 말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침에 청소기도 돌리지 않고 걸레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오전 내내 아무도 없는 집에 앉아 거실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참 쉽지 않구나. 산에 오르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아이들 기분을 맞추는 일도, 인생을 찾는 일도. 초여름 볕에 먼지들이 비춰, 거실에 내려앉는 것이 보였지만 R 씨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냥 문득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평생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가족이 바로 R 씨 자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아끼며, 해외여행 한 번 가지 않은 자신의 삶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아니라고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해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분명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가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이제는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습니다. 산이든, 문화센터든 자신의 욕망이 아닌 듯싶었습니다. 


R 씨는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름 볕이 멀리 내려앉아 어둠이 내릴 때까지 R 씨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늘 미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합니다. 사실 그것은 공식처럼, 전통처럼 내려오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위해 참아야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참아야 하고, 집을 사기 위해 참아야 하며, 아이들 교육을 위해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노후를 위해 계속 참아야 합니다. 분명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기르고, 집도 사고, 노후를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참으면 언젠가 찾아온다는 생활의 행복은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참는 삶' 그뿐입니다. 

더 슬픈 것은 이런 인내의  삶이 나름의 근거와 논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내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에 논리적으로 이길 방법은 사실 없습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이길만한 논리를 우리는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늘 매일매일의 규칙적인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일상에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삶의 즐거움에 우리의 시간을 할애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일상은 그대로 굳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던 즐거움은 점점 잊히고 우리는 늘 미래에 쫓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무엇으로부터 쫓기는 우리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행복한 아이를 원하는 것처럼, 아이도 행복한 부모를 원한다는 것을요. 조금만 현실의 즐거움에 양보하세요. 미래에 대한 걱정에 휩싸여 아이들과 오늘의 즐거움을 미루지 마세요. 언젠가 나 자신을 되찾고 싶을 때, 나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누군가의 부모가 될 수도,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가 될 수도 있지만 결국 나는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하루에 한 번 아주 잠시, 스스로의 기분을 생각하고, 스스로의 즐거움을 고려하고, 스스로를 위해 시간을 갖도록 하세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결국 확고한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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