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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빛 Jul 04. 2023

초보에게는 슬럼프가 오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안 되는 날이었다. 낮은 서브를 넣으려고 살짝 바꿔 본 자세가 몸에 익지 않아서 몇 번이나 실수를 했다. 차게 외친 "버디!"가 무색하게 공은 네트에 걸려버렸다. 서브 캐치를 하겠다고 뛰어 들어가면 내 예상보다 공이 한 발 뒤에 떨어져 팔뚝으로 겨우 공을 쳐올렸다. 길게 온다 싶어 뒤에서 기다리면 손톱 끝에 걸리며 툭 떨어지는 공이 어찌나 아쉬운지. 내가 받은 공은 단 한 개도 세터에게 닿지 않았다. 2단 토스는 언감생심이었다. 다른 팀과의 친선경기만 하면 영혼이 반쯤 나가는 나를 향해 잘하고 있다며 코트 안에서 위로 담긴 격려를 해주는 언니들에게 눈물을 머금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전반적인 삐그덕거림의 시작은 지난주 금요일 레슨이었다. 대회를 사흘 앞두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참가 취소가 결정되었다. 대회 준비를 위한 레슨 대신 수비수를 위한 레슨이 진행되었다. 를 포함한 리 팀 수비수 동생 라인이 대체적으로 자세가 높은 편이다. 게다가 센 공을 죽이지 못하고 그대로 쳐서 튕겨버리는 습관들이 있다 보니 그런 부분들을 고치는 레슨이었다.


  여기서부터 나는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히 거의 스쿼트 자세만큼 몸을 낮췄는데 왜 이렇게 몸이 서있냐는 지적이 날아들었다. 자세를 신경 쓰다 보니 공이 날아오는 위치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어렵고, 자리를 못 잡으니 몸이 아니라 팔로 공을 쳐서 날려버리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급기야는 스텝도 꼬이기 시작해 왼쪽으로 오는 공을 받았는데 팔은 왼쪽으로 뻗고, 몸은 오른쪽을 향한 채, 오른발이 왼발 앞으로 가위자로 꼬인, 아무튼 말도 안 되는 자세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레슨부터 친선 경기로 이어지는 삐걱거림에 문득 떠올랐다. 아, 이것이 슬럼프인가? 곧장 포털사이트에 '슬럼프'를 검색해 보았다. 이버 지식백과에 검색된 체육학대사전(2000)에서는 슬럼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스태미나라든가 활동 등의 소침(銷沈) 또는 부진 상태란 의미로서-

  음, 부진 상태. 그렇지.

- 스포츠의 연습 과정에서 어느 기간 동안 연습 효과가 올라가지 않고, 스포츠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여 성적이 저하된 시기를 말한다.-

  의욕을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성적이 저하되긴 했어.

-연습 과정에 있어 고원(高原 : plateau)과 비슷한 현상이지만, 고원은 비교적 연습의 초기에 나타나는, 연습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 특징으로서 진보의 과정에서 일시적인 정체를 나타내는 데 반하여 슬럼프는 비교적 후기에 나타나 기술의 악화, 심적 동요, 초조가 현저하다는 것이 다르다.-

  비교적 후기에 나타난다고? 그럼 이건 슬럼프가 아닌 건가보군.


  얕은 공부 결과 슬럼프와 고원 현상은 비슷하지만 다른 것 같다. 그리고 아직 실력이 어느 경지에 오르지 못한 나의 부진은 슬럼프보다는 고원현상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아니, 고원현상이라 믿고 싶다. '진보의 과정에서 일시적인 정체'이니 지금은 뭘 해도 안되지만 곧 진보의 경험이 있을 터이니 말이다.


  무언가를 배울 때 사람은 계단식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배구를 시작한 지 햇수로 5년, 코로나와 임신, 출산으로 쉰 기간을 빼면 만으로 3년이 채 되려나? 지금이 나의 배구 인생에 몇 번째 계단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 부진의 순간을 지나 초보 수준을 벗어나는 날이 오겠지? 슬럼프를 슬럼프라 부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그날을 향해, 오늘도 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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