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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철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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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빛 Dec 14. 2023

찬바람이 불면 꿀배를 만들자.

겨울, 배숙

  바람이 차가워졌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했던 대로 딸의 기침이 시작되었다. 며칠 전부터 등하원을 할 때 반 친구들이 콧물을 훌쩍이고 있는 걸 봤으니 다다는 그나마 늦게 감기가 찾아오는 거였다. 아직은 콧물도 나지 않고 잘 때 심해지는 기침 말고는 증상이 없어서 열이 나기 시작하면 병원에 가야겠다 생각하기를 며칠, 잠든 다다의 마른기침이 잦아들지 않았다.


  문득 배숙이 떠올랐다. 그래, 배숙이 있었지. 어린 시절 겨울이면 가끔 엄마가 배숙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큰 배의 속을 파내고 꿀과 대추를 넣어 쪄내면 달큰한 물이 배 한가득 차오른다. 따라낸 배숙을 마시고 커다란 배 속을 긁어먹기도 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특히나 기침에 좋다니 생각난 김에 바로 배와 대추를 주문했다. 건대추를 잠시 물에 담가두고 배를 씻고 있으니 남편이 슬쩍 구경을 하며 궁금한 티를 낸다. 마침 남편도 다다에게 옮았는지 기침이 시작된 참이다. 어릴 때 먹어본 적이 있다며 관심을 보이길래 다 만들면 한 그릇 먹으랬더니 다다 기침 계속하니 많이 먹이라며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는 거실에 가 다시 눕는다. 싱겁고 다정한 사람이다.


  괜히 배가 끓어가며 동동 뜨는 모습을 보고 싶어 유리 냄비를 꺼냈다. 원래의 배숙은 배를 통으로 끓이지만, 먹기 쉽고 보관하기 쉽도록 배를 손톱만 한 크기로 깍둑 썰었다. 불려서 씻은 대추 다섯 알과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감기와 기침에 좋다는 생강을 편으로 넣고 싶었는데 향이 강해 다다가 먹지 않을까 봐 생강가루를 소심하게 뿌렸다. 사실 나도 생강향을 즐기기에는 아직 어린 입맛이다. 1시간을 끓여 내니 숟가락으로 살짝만 눌러도 으깨지는 부드러운 배숙이 되었다. 대추를 체망에 걸러내고 나니 진한 색이 나와 제법 그럴듯하다. 제철을 맞은 배가 아주 달았는지 배숙에는 꿀 한 방울 넣지 않았는데도 꿀만큼 달았다.


  다다가 보는 앞에서 꿀을 몇 방울 넣어주며 "이거 먹으면 콜록콜록 안 한대."하고 말해주었다. 달달한 맛에 숟가락 가득 잘도 먹으며 "꿀배 먹으니까 콜록콜록 안 하네?"란다. 배숙의 효과가 먹자마자 느껴지나 보다. 배를 다 먹여달라고 하더니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릇을 들어 후루룩 마신다. 배숙을 끓인 보람이 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 꿀배 주세요."라며 찾는 모습에 뿌듯해져 올 겨울 들어 벌써 커다란 열 개를 끓여냈다. 배숙, 아니 꿀배 덕인지 다다의 기침은 사그라들었고 온갖 감기바이러스가 판을 친다는 이 겨울, 아직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꿀배의 효과를 믿어버린 나는 아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배와 대추를 사다 배숙을 끓일 것이다. 우리 집의 겨울 음식이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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