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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빛 Dec 21. 2023

메마른 하루에 습기를 더하는 일

겨울, 알곡차

  사계절 내내 하는 일이지만 겨울이 되면 조금 더 중요해지는 일이 있다. 바로 알곡차를 끓이는 것이다. 보리, 현미, 옥수수 알곡에 메밀, 우엉, 결명자 같은 것들을 섞어 끓이는 단순한 일이다. 그날그날 손이 가는 대로 알곡을 고르는데, 요즘은 옥수수와 기관지에 좋다는 작두콩을 넣은 조합을 즐긴다. 실은 옥수수와 작두콩이 선반 맨 앞에 있어서 안쪽까지 손을 넣기 싫은 게으름에 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곡차를 끓이다 보면 갈색의 범위 안에서 미묘하게 다른 색이 보인다. 옥수수와 작두콩을 섞으면 아주 진한 갈색, 보리는 약간의 주황빛이 섞인 갈색, 현미는 연둣빛이 느껴지는 탁하고 옅은 갈색이다. 볶아놓았으니 알곡만 봐서는 모두 비슷한 갈색이지만 우러나온 색은 다 다르니 뜨겁게 지켜봐야 한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30년도 더 된 작은 아파트는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다. 정수기를 설치하려면 비용이 좀 더 든다기에 2인 가족이었던 우리는 생수를 사 마시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생수를 사나르다보니 매일같이 쌓이는 생수병에 찜찜한 마음이 들어 곧 수돗물을 끓여마시기 시작했다. 큰 주전자에 가득 물을 끓여서 네모난 티백을 넣으면 익숙하고 구수한 보리차가 된다. 며칠에 한 번 보리차를 끓이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물을 끓이는 것보다 주전자를 씻는 것이 정말이지 너무 귀찮았다. 주전자의 좁은 주둥이와 안쪽으로 말려뒤집어도 물이 고여 나오지 않는 입구를 씻는 건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래도 매번 보리차를 끓인 건 생수보다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보리차가 훨씬 맛이 좋다는 남편의 말 때문이었다. 귀찮음을 감수게 하는 건 애정이다.


  다가 물을 마시기 시작(제법 사람답게!)하면서 우리 집 식수는 다시 생수가 되었다. 네모 티백도 진짜 알곡이 되었고, 그러면서 종류도 다양해졌다. 생수병은 여전히 찜찜하지만 빈병을 수거해 리사이클한다는 스*클의 캠페인을 믿어본다. 주전자도 진화했다. 무려 온도가 유지되는 분유 포트다. 커피에는 여전히 '얼죽아'를 외치지만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물 한 잔이 당기는 계절에 특히나 황송한 장비다. 심지어 손으로 벅벅 닦고 와르르 쏟아낼 수 있는 넓은 주둥이 덕에 설거지도 이렇게 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다시 주전자를 꺼내야 하나 고민한다. 보글보글 끓으면서 내뿜는 뜨신 김이 그리워서다. 정강이까지 따끔한 겨울날에는 하루 한 번 끓이는 알곡차의 습기마저 소중하다.


  우리 집 부녀는 그다지 예민하지 않다. 보리차든 현미차든 뭘 마시는지도 모르는 눈치다. 남편은 찬 물이면 그만이고, 자리끼를 꼭 두는 다다도 물 맛은 가리지 않는다. 사실 나도 예민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생수를 마셔도 그만이긴 하다. 그래도 알곡차를 계속 끓일 거다. 저마다의 맛이 있어서 물을 많이 마시게 되니 좋고, 나름의 효능이 있다고 하니 건강에 좋겠지 싶다. 무엇보다 알곡차를 골라 거름망에 한 스푼 넣을 때, 때깔만 봐도 구수하게 끓는 모습을 볼 때, 아침마다 따뜻한 알곡차를 물병에 따라 다다와 내 가방에 챙겨 넣을 때 기분이 좋다. 괜히 마음도 뜨뜻, 섬세한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이다. 메마른 겨울 일상에 알곡차 한 잔이 따숩게 습기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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