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니 Oct 15. 2023

잘 모르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지금은 2023년 초가을이고, 나는 서른네 살이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모닝페이지를 쓰고, 시를 필사했다. 오늘 노트에 적은 시는 김선재 시인의 <목성에서의 하루>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다. '열 손가락을 깨물면 각기 다른 맛이 난다'라고 시작하는 이 시를 마지막까지 따라 썼다.


오늘은 일요일이므로 출근 준비 대신 커피를 탄다. 커피잔을 들고 와 다시 의자에 앉는다. 에버노트를 열어 주간일지를 쓰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한다. 나는 저번 주부터 하나의 문장만을 곱씹고 있다. '당신에게 사랑은 무엇인가요'라는 이 질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처럼 느껴진다.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가. 도대체. 추상적인 질문은 싫다. 너무 막연한 것은 시도조차 주저하게 만드니까.


추상적인 주제에 대해 가장 잘 접근하는 방법은 구체적인 일화나, 사물에 대해 쓰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에 관한 일화나 사물에 대해 쓰는 걸 일주일 전에 포기했다. 연애이야기에 대해서 쓰고 싶진 않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진실하게 쓸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가장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쓰면 어떨까.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와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마치 마무리를 지을 것처럼 써 내려갔지만 도중에 멈췄다. 사랑 이야기라서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좋은 것인데 이걸 어떻게 표현할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사랑이란 마치 손에 잡을 수 없는 구름 같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볼 수 없고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으려나.


모르는 것에 쓰는 일은 어렵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뭘까. 열정, 애틋함, 욕정, 그리움, 집착, 질투. 사랑 안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이 숨겨져 있다. 나는 그 감정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2,000자 가까이 되는 글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백스페이스를 꾹 눌렀고, 다시 빈 화면과 마주했다.     


*     


며칠 전 회사에서 40대 후반의 부장님과의 점심을 먹을 때였다. 일본인인 부장님과 이야기하면, 딱히 공통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일본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이번에는 어쩌다 보니 영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최근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님의 신작이 기대돼요. 한국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제법 인기 있죠. 예전에 <너의 이름은>이 히트쳤어요. 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잖아요.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에 일본 영화를 좋아했어요. 사랑 이야기나, 힐링되는 그런 영화를.


그런 대화를 나누다 불쑥 부장님이 이런 말을 했다.

"그렇군요. 저는 딱히 사랑 영화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해요. 오히려 아이가 혼자 심부름하는 리얼리티에는 꽤 감동을 받지만.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일지도 모르죠"

나는 샐러드를 젓가락으로 집다가 부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무심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은 금방 아이가 심부름하는 예능으로 옮겨갔고, 나는 돈가스를 씹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20대에 본 청춘 영화에 대해.


10년 전 나는 일본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원룸 방 안에 홀로 앉아 노트북에 <Tokyo!>,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메종 드 히미코>, <100만 엔과 고충녀>을 계속 틀어놓았다. 잔잔하고 큰 사건이 없는 이야기였다. 평범하고 현실적인 이야기. 그래도 주제를 찾아보자면, 사랑이었다.

나는 그런 사랑 영화에 마음이 사로잡혔었다. 대사를 외울 정도로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서 밥을 먹고 일기를 썼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때 사랑이 중요했었던 것 같다. 연애하면서 스스로 많이 놀랐으니까. 나 자신이 전혀 이성적이지 않고, 치졸한 사람임을.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불같이 화내고, 애태우면서, 나약한 사람임을 깨달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오히려 잔잔한 영화를 찾았던 걸까. 알 수가 없다.


세월이 흐르고 경험한 것들이 많아짐에 따라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 때문에 울거나 화내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랑 때문에 울었던 가장 최근 기억이 7년 전이다. 남편과 싸우고 난 다음 날, 탕비실에 혼자 들어가 휴지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울었던 날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 연애했고, 불같이 사랑했고, 많이 싸웠다. 인생에서 한 사람과 이렇게 많이 싸울 수 있을까 싶었다. 나의 오만함과 편협함을 무기로 자존심을 내세웠고, 서로 상처받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거의 남편과 싸우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우리가 변해서일 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 자신이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리고 사랑의 형태도 변했다.     


*     

삶은 흐른다. 그리고 모든 것의 정의도 변한다. 사랑 역시 그러하고, 나 역시 그렇다. 서른네 살의 양영희는 서른다섯 살이 되고, 마흔이 될 것이며 운이 좋으면 여든 넘어서도 살 것이다. 스무 살에도 사랑을 했고, 서른 살에도 사랑을 했으며, 앞으로도 사랑을 할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 문장처럼. 안양천에 피어있는 장미들도 못 본 사이에 다 말라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보일 것이다. 찾아오는 벌도 줄어들 것이고, 향긋한 장미 향도 더 이상 나지 않을 것이다. 어제 오후 산책을 하면서 그 장미들은 이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슬프거나 하지는 않다. 변하는 게 당연하다. 사랑에 대한 시각은 변하고, 나 자신도 변한다. 그러니 사랑에 대해 쓰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사랑의 형태로 삼각형 이론을 만들었다. 친밀함, 열정, 약속을 세 가지 구성요소의 조합으로 다양한 유형의 사랑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만약 친밀함만 있는 사랑이라면, 친구 같은 사랑일 것이며 약속만 있는 형태는 정략결혼 형태의 사랑일 것이다. 이 유형을 조합하면 8가지 형태의 유형이 나온다. 모든 것이 갖춰진 사랑도 있고, 모든 것이 부재한 사랑이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사랑으로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     


에세이를 쓰다 보면 잘 모르는 것을 잘 모른다고 쓰기가 어렵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일인데, 결국은 어느 정도의 불확실한 답은 가지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소설 역시 직접적으로 주제를 전달하지 않지만, 뒤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독자에게 와닿는 게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게 없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라고 갸우뚱거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대해 그 어떤 정의도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사랑은 '각기 다른 맛이 나는 열 손가락'처럼 모든 이들에게 다르고, 모르는 맛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내가 아는 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그저 오늘 아침에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매일 쓰는 것과 같은. 또 내가 아는 건 나에게 장난치려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글쓰기를 멈추고, 같이 장난치며 웃어주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3-09-17)


 


덧붙임 : 다음 에세이는 10/22에 올라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속도대로 걷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