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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Dec 17. 2023

인토네이션


"너는 인토네이션이 참 좋네."

일본 유학 시절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기숙사로 돌아가 전자사전을 뒤져보니 인토네이션은 억양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였다. 원어민은 대개 외국인이 말하는 자국어를 후하게 평가하므로, 나는 '일본어를 잘하네요. 발음이 참 좋네요'하는 말을 유학 초창기에 자주 들었다. 그게 외국인과 첫 대화에서 할 말이 없을 때 꺼내는 레퍼토리인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썩 좋았다. 언어의 장벽을 느끼고 자신감을 잃어갔던 때라 오히려 위로되었달까.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도 그 단어만은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일본어를 까먹는데도 왜 이 말은 선명하게 기억하는 걸까. 단순히 칭찬이라 서가 아니라, 궁금증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통 발음이 좋다는 말은 많이 들을 법하지만, 억양이 좋다는 말은 잘 듣기 어렵기도 하니까. 또 단순히 발음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서 나에게 무언가 있는 걸까, 싶기도 하다. 나는 억양이 왜 좋은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두서없이 하다가 불현듯 부산 사투리를 쓰던 시절이 떠올랐다.

'가가가가가' 라는 문장의 뜻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작하기 어렵겠지만, 부산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걔가 걔니?'라는 뜻인 것을. 그게 가능한 것은 억양 때문이다. 음의 높낮이 때문에 문자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을 구사할 수 있다. 


태어나서 20년 가까이 부산에서 살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부산 사투리를 썼다. 억양이 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내 억양에 대해 한 번도 인지한 적은 없었다. 사투리를 쓴다는 자각도 없었다. 오히려 TV에서 흘러나오는 표준어와 내 말 자체가 다르다는 걸 완전히 깨달은 건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였으니까.

한 번은 수능을 보고 대학교 합격 발표가 났을 때, 기숙사 룸메이트가 이런 말을 했다.

"니 부산 억양이 너무 심해서 서울 애들이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노"

"억양이 심하다고? 내가?"

"당연하지."

정말 몰랐냐는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 주변 모든 사람이 비슷한 억양으로 말한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내 세계에서는 그게 표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의 말투가 느끼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스스로는 사투리를 쓴다는 자각이 없었다. 


졸업하고 서울에 작은 방을 구하고 나서도 친구의 말이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말 억양 때문에 서울 애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하고, 따로 연습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나는 대학교 첫 OT에서부터 물 흐르는 듯 표준어를 썼다. 주변 친구들과 동기화된 듯 스스럼없이 서울말을 쓰는 나에게 스스로 놀랐다. 친구들에게 부산에서 왔다고 말하자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한국어가 아닌 경우도 비슷했다. 일본어를 배울 때는 표준어를 썼는데 막상 유학을 가니, 그 지역 사람들의 억양을 단번에 따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도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 표준어를 썼다. 한 번은 취재 여행으로 일주일 동안 홋카이도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한 일본인 아주머니에게 자신보다 깨끗한 표준어를 쓴다는 말을 들었다. 다만 문제점도 있다. 서울에서 부산 사투리를 써보려 시도하면 오랫동안 기름칠하지 않아 뻣뻣한 깡통 로봇같이 어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처음 만난 부산 사람에게 나는 사투리를 쓸 수가 없다. 분명히 가짜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니까. 가끔 친근하게 사투리로 주고받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최근 같은 부서가 된 외국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양상은 언어에 위화감이 없네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인토네이션이요 하고 말했다. 뭘까, 왜 이렇게 억양이 자동으로 바뀌는 걸까. 어쩌면 내 몸 안에 억양 자동 전환 장치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름은 인토네이션. 생체 GPS로 지역을 인식하면 몸 안에 숨겨져 있는 스위치가 달칵하고 눌러져 억양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게 된 기질 같은 건지,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억양은 나라는 생명체에 붙어 있는 추가 기능 같아 보인다. 노래는 못하면서 왜 이런 기능이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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