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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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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Mar 23. 2024

한강산책클럽

11월 초지만 벌써부터 한겨울의 냄새가 났다. 신사역 5번 출구에서 나오자 찬바람이 밀려왔다. 나는 감색 점퍼에 달린 지퍼를 위로 끝까지 끌어올렸다. 지하도를 건너자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모임 시간은 8 시였다. 산책 코스는 잠원 한강 공원에서 동작대교까지였던가. 저녁 약속은 갑자기 취소되었고, 공복에 붕 뜬 시간을 견디지 못해 일찍 나오다 보니 모임 시간보다 이십 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8시 정각에 가까워지자 다가오자 회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형광 바람막이를 걸친 젊은 정육점 주인,  회색 등산복을 입은 50대 회사원, 그리고 나이키 검은 운동복을 입은 주최자. 이들 모두 내가 모임에 참여하기 전부터 있었던 사람들이다. 나는 고개를 꾸벅이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매번 모임 때마다 짧게 자기소개를 하지만 그다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단지 한강을 저마다의 이유로 걷는다는 정도 밖에는 잘 몰랐다.

한강 산책 클럽은 매주 토요일마다 한강에 모여 두 시간 정도 걷는 모임이다. 문자로 공지가 오면 시간이 되는 회원들은 정해진 장소에 모인다. 그리고 모인 사람끼리 체조를 하고 정해진 코스를 자유롭게 걸으면 된다. 다 걷고 나면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물론 지친다면 중간에 혼자 돌아가도 괜찮다. 참가비나 뒤풀이도 없다. 흔한 오픈 채팅방도 없고 멤버가 누군지도 모르는 익명의 클럽이고, 홈페이지도 공지 게시판과 한 달에 글 한 편이 겨우 올라올까 하는 자유게시판 두 개만 있을 뿐이다. 우연히 점심시간에 클럽 홈페이지를 발견해 가입신청 메일을 보낼 때도 나는 이곳이 여전히 운영을 하는 곳인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이런 어중간한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지만 내가 가입한 이후로 모임이 취소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 역시 이런 이상한 모임에 가입하고 일 년이 넘도록 매주 토요일마다 빠짐없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여기로 흘러들어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 걷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혼자는 걷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기 하다. 애초에 한강 산책 클럽은 친목이나 운동모임은 아니다. 땀을 내며 운동을 하는 달리기도 아니고, 속도를 즐기는 사이클도 아니다.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걷는 게 다였다. 누군가의 속도에 맞추기보다 자신의 걸음대로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라는 점이 나는 마음에 들어서 계속 가는 건지도 몰랐다. 


*


주최자가 오랜만에 신입 회원을 소개했다. 20대 중반으로 돼 보이는 여자였는데 마치 숙제를 까먹어 교무실에 들어온 학생처럼 정육점 주인 옆에 몸을 쭈뼛거리며 서있었다. 무릎길이까지 내려오는 남색 원피스에 5센티가 넘어 보이는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마치 새 옷 냄새가 빠지기 전에 입은 것처럼 깔끔해 보였다. 다만 도무지 산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복장이었다. 

"한나은입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자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과 나이 직업을 간단히 돌아가며 말했다. 가끔 이렇게 흘러 들어온 새로운 회원들은 한두 번 오고 나면 대부분 사라졌다. 한 번은 이런 의미 없는 모임 따위 시간 낭비라고 블로그에 리뷰를 올린 사람의 글도 본 적이 있었다.

"다 오셨네요. 그럼 체조 시작하겠습니다."

주최자가 말했다.

우리는 한강 공터 가운데에서 일렬로 서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앞에 나와있는 주최자가 다음 동작을 먼저 시작했다. 주최자가 직접 만든 이 체조는 국민 체조와 스트레칭을 섞어 만든 동작 같은데 생각보다 몸을 푸는데 효과적이다. 신입으로 들어온 여자는 처음에는 당황한 듯 주춤거리더니, 이윽고 머리카락을 높게 묶고 동작을 크게 따라 하기 시작했다. 뻣뻣했지만 처음 치고는 제법 잘 따라 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휘날리자 빨개진 귀가 보였다.  

체조를 마치자 주최자는 오늘의 코스를 간단히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오늘도 좋은 산책되시길'이라고 말하고는 먼저 걸어 나갔다. 나는 항상 마지막에 걷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그들이 한 사람씩 출발하길 기다렸다. 보통 회원들은 각자 세네 걸음 정도 떨어진 채 간격을 두며 출발했고, 마지막에 모임 장소에 다시 모이고 헤어졌다. 그런데 그녀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먼저 가시죠'라고 말하자 그제야 그녀는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조금 멀찍하게 떨어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책길 옆으로 강물이 흘렀고, 억새가 바람 따라 춤을 췄다. 자전거 전용길에는 타이즈 차림에 보호구까지 한 무리가 음악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옆을 스쳐갔다. 상쾌한 한강 바람에 불자 나는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대학시절 내내 들었던 <Walk, Walk>라는 노래가 떠올렸다. 추운 날씨에 한강에서 듣기에 딱 좋은 음악이었다. 머릿속에서 한 소절을 떠올리고 다음 구절을 이어나갔다. 걸으면서 강물 위로 불빛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을 응시했다. 검은 물결 위로 노란, 빨강, 초록불빛이 번졌다. 산책을 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다. 천천히 흘러가는 강, 반짝이는 불빛들, 그리고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마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물고기처럼 사람들은 각자 계속 어디론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강가를 바라보며, 강이 흐르는 소리에 집중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평소와 달리 몸이 금방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새벽에 식은땀을 흘리며 깼는데,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께름칙한 느낌이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꿈이 기억나지 않았다. 볼에 열이 달아올랐고 나는 약간 술에 취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깨닫지 못한 사이 나은이라는 여자와 팔을 뻗으면 바로 부딪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결코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양손을 자신의 팔뚝을 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걸음걸이였다. 마치 산책하는 사람이 아니라 벌을 받으러 가는 사람 같았다.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말을 걸어볼까 하는 데 갑자기 그녀의 오른쪽 발목이 꺾이더니 그녀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괜찮으세요?"

나는 놀라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오른쪽 무릎에 스타킹 구멍이 나있었다. 구멍이 난 부분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발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발목을 삔 것 같았다.

"일어서실 수 있겠어요? 아무래도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병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옷에 묻은 낙엽을 떼어냈다. 

"안 돼요. 오늘 꼭 여길 걸어야 해요."

그녀는 내 눈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더 가시면 발목이 더 상할 텐데요. 피도 흐를 거고."

그녀의 무릎에서는 피가 고이고 있었다. 

"그래도 꼭 가야 해요."

마치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시면 제가 부축이라도 해드릴까요?"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조금 머뭇거리더니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

나는 팔꿈치를 조금 더 뻗어 그녀가 잡기 편하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상처 난 부위에 묶은 뒤 나의 팔을 붙잡았다. 발목이 계속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녀는 내 옆에서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


그녀와 한동안 말없이 천천히 걸었다. 평소보다 좁은 보폭으로 걷다 보니 그새 몸은 식었고, 바람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줄지어 펼쳐진 단풍나무들이 밤바람에 흔들렸다. 어느새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발을 뗄 때마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건조해진 공기에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힐끔 보니 단정한 외모에 속눈썹이 길었다. 거의 삼십 분 넘게 걸은 것 같은데도 그녀는 멈추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간을 보니 이미 다른 사람들은 걸은 뒤 해산한 것처럼 보였다.

분기점인 동작대교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여의도, 남산 타워, 한강대교가 보였고 하늘색 교각 위로 노란불 빛을 뿜는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열차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때쯤 그녀가 갑자기 멈췄다.  

"잠시만요."

역시나 더 이상을 무리였던 걸까. 굳은 양초처럼 서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다리 아프신가요?"

"그게 아니라, 저 다리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녀의 시선의 끝을 따라가 보니 교각 아래에 두꺼운 기둥에 닿았다. 어딘가 익숙한 기둥이었고 한강 산책 클럽 홈페이지에 찍힌 사진과 똑같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하늘색 다리 밑에 세 개의 기둥이 서 있는,  <한강 산책 클럽>이라고 필기체로 흘겨 쓴 흰색 글씨가 박힌 사진이 홈페이지 메인 화면이었다. 한참 우뚝 서서 그곳을 쳐다보던 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돌아가자고 했다.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되돌아가자고만 반복해서 말했다.  

모임장소로 돌아온 건 밤 열 한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아무도 없이 노란 가로등만이 어둑한 밤길을 비친 곳에서 그녀는 벤치에 앉아 발목을 주물렀다. 아마 한계까지 밀어붙인 듯 발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었고 얼굴은 더욱 창백했다. 

"잠깐만 계세요. 약국 다녀올게요."

나는 그녀에게 말한 다음 지하도를 건너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듬성듬성 놓여있는 가로등이 노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편의점, 분식집, 휴대폰 상가를 지나도 약국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왜 달리고 있는지 그녀를 신경 쓰고 있는지 잘 몰랐다. 다만 퉁퉁 부은 발목을 보니 단지 어떻게든 그녀를 그만두게 했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오분 정도 뛰고 나서야 흰 약국 간판이 보였다. 나는 파스와 연고, 밴드를 사서 다시 공원으로 돌아왔다.

벤치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 허탈해져 힘이 쭉 빠진 나는 벤치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강바람에 약봉지가 바스락거렸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톡톡 건드렸다. 그녀였다. 

"화장실 다녀왔어요."

나는 그녀에게 약봉투를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들더니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새하얀 다리를 꼬았다. 스타킹을 언제 벗었는지 맨다리였다. 내가 준 손수건은 그녀의 작은 가방에 묶여있었다. 그녀는 피가 난 부위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제대로 소독하지 않으면 흉이 질 거 같네요."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까짓 건 금방 나으니까요."

파스를 발목에 붙이고 그녀는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봤다.

"저랑 괜찮으시면 맥주 한 잔 안 하실래요?"

그녀가 물었다.

"지금요? 발목은 괜찮으세요?"

"덕분에 이제 좀 나아졌었거든요. 그리고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어서요."


*


한강 산책 클럽에 가입하고, 누군가를 다른 공간에서 볼 일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모임이라면 모를까, 여기는 애초부터 마치 모임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긴 한강 산책길이 아닌 곳에서 나는 오늘 처음 본 그녀와 어깨를 맞대며 걷고 있었다. 그녀는 절뚝거리면서도 성큼성큼 잘 걸었다. 

빼곡히 늘어선 아파트 단지를 거처 작은 골목을 지나고 몇 분이 더 흘렀을까. 그녀는  <스트롤>이라고 적힌 나무 간판이 달린 가게에서 멈춰 섰다. 작은 빌라들 사이에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날 칠만한 가게였다.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불투명한 벽이 감싸고 있었는데 문을 여니 내부는 넓었다. 벽 쪽에는 큼직한 천장 안에 위스키가 빽빽이 진열되어 있었고, 안쪽으로는 넓은 간격으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독특하 건 바닥이 모두 인공잔디가 깔려 있었고, 벽면은 모두 오크색 나무벽이었다. 그리고 외국의 공원 사진이 담긴 나무 액자가 듬성듬성 걸려있었다. 바 근처에서 모를 재즈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작은 양초는 은은한 불꽃을 내뿜고 있었고, 오래된 책장 냄새가 났다. 

"한강 산책 클럽에 새로 오신 분은 오랜만이에요."

그녀는 메뉴판을 넘기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무작정 신청하고 나온 거예요. 고백하자면 늘 밤에 한강에 제가 가게 될지 몰랐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은 옷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런 산책 클럽이 있다는 거 어제까지만 해도 몰랐어요."

그녀는 다시 나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공복이라 제법 배가 고팠을 만 한데 이상하게도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기네스 두 잔을 시켰다. 그녀는 마치 아까 다친 상처 따윈 아프지 않은 듯 평안한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듯한 얇은 유리컵에 기네스 맥주가 두 잔 나왔다. 그리고 동그란 나무 접시에 오징어와 땅콩 그리고 마요네즈가 담긴 작은 그릇도 놓였다. 우리는 각자 아무 말 없이 맥주를 한 모금씩 마셨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땅콩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적절한 말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떠올렸다. 그녀는 어색한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강은 솔직히 말하면 정말 오랜만에 온 거예요."

기네스를 반쯤 마시고 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가 한강 산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왜 우리 클럽에 가입하고 넘어지면서도 계속 걸어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까지 걸은 건가요?"

나는 물었다. 그녀는 마지막 한 모금까지 모두 마시고서는 입을 열었다. 

"저에겐 의미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아까보다 조금 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하 씨는 한강을 왜 걸으세요? 그냥 좋아해서?"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한참 할 말을 떠올리다 입을 열었다.

"언젠가 점심시간에 혼자 한강 책을 한 적이 있어요. 회사 식당에 미역국이 나왔는데 체한 기억이 있어서 먹기가 싫더라고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으려다 날씨가 좋아 나왔었어요. 그리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죠."

나는 차가운 유리컵 표면의 물방울을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한참 걸었을까요. 더 이상 사원증을 맨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길거리에 나이 든 노인이 드문드문 벤치에 앉아있었어요. 연두색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 그 너머로 한강이 보였고, 그때 뭐랄까,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강까지. 그때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한참을 강이 흘러가는 걸 바라봤죠. 결국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다는 걸 알았고 결국 상사에게 혼났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어요. 한강을 계속 걸어야 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그리고 우연히 이 모임을 알게 되었어요. "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예전부터 높은 곳보다는 평평한 곳을 좋아했어요. 확 트여 있어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올 수 있는 공간. 짧게라도 한강에 가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죠. 서울의 높은 빌딩들 사이에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한동안 취업 준비를 하고 회사를 다니고 있자니, 내가 한강에 갈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말이 술술 나왔다. 너무 내 이야기만 한 거 아닌가 싶어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이런 이야기 재미없으시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 잔 더 하겠냐고 물었고 그녀는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그녀는 위스키도 좋아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잘 모르니 같은 걸로 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글렌피딕 15년 산을 한 잔씩 주문했다. 가게에는 우리 둘 밖에 없었는데 들어오기 전 보다 재즈 음악이 더 화려해졌다. 

"사실 15년 만이에요."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혹시 괴물이라는 영화 본 적 있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최근에 봤지만요."

"저는 초등학생 때 영화를 봤었어요. 친구와 둘이서요. 그게 아마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였을 거예요. 조금 우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 영화를 본 이후 한강을 갈 수가 없었어요. 한강에 가면 검고 큰 괴물이 여전히 살아있고, 나를 낚아채 어딘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갈 것 같거든요.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저를 삼켜버릴 것 같았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가늘게 떨렸다.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잊히지가 않더라고요. 엄마는 제게 그건 가짜고 한강에는 괴물이 살지 않는다고 말해줬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아요. 이후에는 한강을 지나갈 때마다 오싹한 마음이 들었어요. 가까이는 더 갈 수 없었죠. 마치 금지구역 팻말이 마음속에 박힌 것처럼요. 학교를 다닐 때도 친구들과 한 번도 놀러 가지 않았어요. 거의 영화의 내용도 까먹었지만, 삶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런 검고 큰 것이 떠오르는 거예요. 제 마음속에는 그 괴물이 계속 한강에 살아있는 느낌 말이죠."

그녀는 말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런 이야기 재미없으시죠?"

나는 웃었다.

"아니요. 그런 것들이 불쑥 튀어나와 일상을 흐트러놓기도 하죠."

"맞아요. 가끔 그 이상한 기분이 싫어질 때가 있었어요.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목에 걸린 것처럼 남아있는 기분 같은 거요. 조금 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걸 한 번쯤은 깨부수어야 할 것 같았어요. 아니면 영원히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 같아서요. "

나는 제법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괴물보다는 배우의 연기를 흥미롭게 봤을 뿐이었다. 그 존재가 진짜 내 삶에 위협이 된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불안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내 안에서 계속 재생되는 그런 장면들처럼. 다른 이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나를 덮쳐오는 것이 느껴질 때도.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도 않지만. 그래도 불안하고 음습한 것들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게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혹은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것처럼 보여도 말이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오실 수 있었던 건가요?"

"최근에 다시 영화를 봤어요.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도망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그건 상상 속에서 나를 따라다녔던 그런 괴물이 아니었어요. 작고, 볼품이 없어 보였어요. 징그럽진 않은 건 아니었지만 도마뱀 같기도 한 느낌이었어요. 제 속의 괴물은 검고 커서 저를 단숨에 삼키고도 남을 만큼 느껴졌거든요. 저는 어쩌면 실체가 없는 어떤 것에 쫓긴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여기를 오게 된 거예요. 오늘 아침에 클럽을 알게 되었고 그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녀는 빈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렸다. 

"한강을 걸으며 정리하고 싶었어요. 끝까지 걷고 직접 그곳을 보자고. 그래도 역시 가까이 다가가자 떨림은 멈추지 않았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결국 가까이까진 가지 못했지만 만족해요. 오늘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도 그래도 같이 있어주는 존재가 필요했었어요. 무하 씨를 만난 건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는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시간이 꽤 되었네요. 근데 참 이상해요. 이런 이야기는 친구들한테도 잘 안 하는데, 왜 이렇게 오늘은 쉽게 나올까요?"

나는 내 옷매무새를 만졌다.

"같이 한강을 걸었으니까요."

"네. 같이 걸었죠."

그녀가 웃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나 역시 바로 따라가 지갑을 열려고 했지만, 그녀는 약값이라며 자신의 카드를 점원에게 건넸다.

"오늘 제 이야기 잘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다음 주에도 산책 클럽에 오 실 건가요?"

나는 물었다.

"글쎄요."

그녀가 웃었다.

우리는 연락처를 따로 주고받지는 않았다. 어쩌면 다시 산책 클럽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


나에게 고개를 숙인 그녀는 앞으로 절뚝거리며 나아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차갑고 하얀 초승달이 환하게 떠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시 한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복에 술을 마시고 난 뒤여서 그런지 온몸이 더 으슬으슬했다. 지하도를 지나 다시 한강 공원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었다. 바람은 그새 잠잠해졌고 억새가 흔들리는 소리, 강에서 부는 바람 소리, 그리고 멀리서 자동차 소리만 들려왔다. 노란색과 하얀색으로 섞여있는 아파트에서 흘러나온 빛도 아까보다 조금 더 희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벤치에 앉았다. 건너편에 환하게 빛이 나는 아파트 단지를 응시했다. 사실 그녀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내가 산책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연두색 아파트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 점심시간에  본 연두색 아파트 단지는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어 연식이 오래됐고 나는 금세 내가 초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아파트와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중간에서 양쪽으로 벌어진 복도식, 그리고 동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 그리고 15층까지 있는 것까지. 무언가에 홀린 듯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고 눈에 보이는 210동에는 이삿짐 크레인이 올라가고 있었다.  검은 냉장고 옆에 파란 플라스틱 박스가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었다. 크레인이 올라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 바로 옆집 베란다에 시선이 갔다. 어린 남자아이가 난간을 잡은 채로 올라오는 크레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나는 등 뒤가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고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가슴속에 묻어왔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해 도망치듯 한강으로 달린 것은. 


*


여덟 살 때 살던 아파트는 거실에서 건너편 아파트의 복도가 정면으로 보였다. 바다와 우리 아파트 사이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 바다의 풍경이 반 정도 가려져있었다. 옆동의 복도에 누가 지나가는 잘 보일 정도로 가까웠지만 우리 동네는 안개가 자주 끼어 안 보일 때도 많았다. 특히 아침에는 자주 안개가 끼었는데 나는 밥을 먹으며 베란다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뿌연 안개는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지운 것 같았고, 그러면 마치 내 몸이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떠나는 우주선에 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은 더욱 안개가 짙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미역국을 떠먹으며 평소처럼 창가를 보고 있었다. 반쯤 먹었을 때 창가에 하얀 가운을 입은 어떤 형체가 아래로 떨어졌고 곧이어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 후 밖에서 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역국을 더 내오려 주방에 갔던 어머니는 깜짝 놀라 베란다로 뛰어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눈을 쓸어내렸다.

"무하야. 베란다 가까이 가지 마렴."

그리곤 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엄마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다.

"위에서 꽃병 같은 게 떨어져서 차가 고장 났나 봐."

어머니는 거짓말을 할 때 항상 코를 긁적였고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다. 한순간이었지만 나는 기억했다. 한순간 아래로 툭하며 떨어진 형체와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하지만 어머니에겐 말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안 될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나는 안개 낀 날에 식탁을 앉을 때마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고, 식은땀이 자주 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병원에 데려갔지만, 별 다른 차질은 없었고 결국 무당이 터가 안 좋다며, 이사를 권유했다. 어머니는 금방 집을 내놓았고 우리 가족은 주택으로 이사했다. 그 뒤로 나는 오랫동안 아파트를 살지 않게 되었다. 시간은 흘렀고  까맣게 잊고 지낸 적은 많지만, 가끔씩은 그 기억이 갑작스럽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이다. 25년도 더 된 일이, 1초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순간이, 그렇게 스쳐 지나간 것들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이유를 모른 채로. 하지만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때 만은 진짜였다. 기억이 마음속 한 구석에서 나를 호시탐탐 노리며, 괴롭힐 기회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그녀의 괴물처럼.

나는 아까 걸었던 길을 다시 걸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한강이 누군가에게는 그런 기억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고. 괴물이란 존재가 마음속에는 계속 진짜처럼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녀는 어쩌면, 오랫동안 걸으면서 쌓인 생각을 집에 들고 가고 싶었진 않았던 게 아닐까. 괴물에 대해서, 아니면 한강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쌓인 것들을 보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괜찮다고 외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새벽 아침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헤집고, 현실로 엮을까 봐 나처럼 그녀도 지레 겁을 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강물은 여전히 아파트 조명들에 비쳤지만 안개로 불투명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시간 동안 한강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옛날 기억을 미련 없이 풀 수 있었을까. 사라진다고 사라지는 것일까. 어쩌면 다시 한번 한강을 보더라도 그건 여전히 살아있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깨닫고 보니 나는 동작대교까지 걸어와 있었다. 그녀가 우뚝 멈춰 섰던 곳에 다시 서서 교각 밑을 자세히 바라봤다. 빛 한점 비치치 않는 그곳은 어둠이 내려 깔려 있었다. 천천히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기둥 앞까지 다가섰을 때 기둥 위에 무언가 검은 물체가 웅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다시 크게 뜨고 뒷걸음질 쳤다. 눈을 비비며 다시 봐도 온통 어둠이었다. 뒤를 돌아 지하철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강의 공기가 회색빛 안개로 짙게 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불빛들도 조금은 진하고 끈적해진 기분이었다. 여전히 차들은 줄 을지어 다리 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소리는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뒤를 돌아 교각을 다시 바라봤다. 다리 아래에 살고 있는 검고 큰 물체. 그런 것이 있을까. 나는 강에서 한걸음 떨어져 달리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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