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에 대한 생각
토요일 12시에 결혼식이 있어 용인에서 일산으로 이동했다. 후다닥 점심을 먹고 동료 아버님 상에 조문을 가기 위해 천안으로 차를 몰았다. 모처럼 긴 여정에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며칠전 생일도 지났으니 오십셋. 10년 전, 20년 전 오십대 아저씨들을 바라볼 때 난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이제 겨우 어른 흉내를 내는 정도인데.
운전을 하다 보면 깜빡이를 켜지 않고 들어오는 차들이 많다. 예전에 급하게 차선을 변경해 내 앞으로 들어오는 차들에게 상향등을 켜고 경고하기도 했다. 내가 차선을 바꿔 앞으로 끼어들기도 했다. 그렇게 해 봐야 뭐가 좋았을까. 젊은시절 호되게 당한적도 있다. 송파에 살던 신혼 시절 내 앞으로 아슬하게 끼어든 차에게 크락숀을 눌렀다. '빠아아앙'도 아니고 '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차가 일방통행 길에서 멈추더니 건장한 청년들이 내리는 것 아닌가!
머리 속에서 여러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뒤로 후진을 해서 나갈까? 못 도망치면 문을 잠거야 하나? 영화처럼 창문을 깨면 어쩌지? 다행히 길이 넓어 공간이 보였다. 그 차 옆으로 차를 몰아 도망쳤다. 혹시 쫓아올까봐 수서로 도망쳤다. 한참을 돌아 집에 가며 생각했다.
얌전하게 살아야지. 하지만 그 뒤로도 쓸데 없는 분노를 못 참을 때가 꽤 있었다.
한참 노재팬 운동이 불타오를 때 과태료 통지서를 하나 받았다. 차선변경할 때 깜빡이를 한 켰다는 내용이었다. 통지서를 보니 서하남IC를 나와 둔촌사거리에서 올림픽대로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사거리를 지나 버릇처럼 옆 차선으로 쓱 들어갔었는데, 누가 블랙박스를 꺼내 신고를 한 것이다.
차가 일본차라서 그랬나? 부글부글.
5년 넘어 타고 있는 차는 닛산의 알티마. 일본 브랜드이지만 미국공장에서 만들었고, FTA덕분에 한국 중형차보다 저렴해 오래 타고 있는 차였다. 후다닥 검색했더니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아, 이 치사한 인간들...
한동안 억울함에 나도 누군가 위반하면 신고해야지 벼르고 다녔다. 영동대교 하단부 상습 정체구역이 있다. 주로 퇴근할 때 이용하는 길인데 꼭 1차로 좌회전 전용선에서 직진하는 차가 있다. 자신에서 보는 검정색 승용차의 분위기가 직진할 것 같은 강렬한 포스를 풍겼다. 스마트폰을 꺼내 녹화했다.
잘 걸렸다! 통지서를 받아봐라!
참으로 정성스럽게 캡처하고, 영상을 넣어 '경찰청 스마트 국민제보' 앱에 올렸다. 2022년 12월 19일에 신고했고, 2023년 3월 18일에 최종 답변을 받았다. 요약하면 영상에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어있어야 하니 보완해 달라는 통보였다.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그만뒀다.
일본차건 아니건 차선 변경을 할 때 깜빡이를 켜는 것이 원칙이다. 아무리 한가해도 켜야 한다. 차가 한 대도 없어도 켜면 된다. 손 한 번 잠깐 움직이면 깜빡이가 켜진다. 깜빡이 켠다고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신고 당한건 내 잘못이 맞고, 그날 이후 난 열심히 깜빡이를 켜고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누군가를 응징하고 싶은 마음으로 신고를 하는 것도 내 마음만 불편하다. 차라리 만나는 사람마다 "방향전환할 때, 차선에서 대기중일 때, 추월할 때 아무튼 차가 다른 곳으로 움직일 때 제발 깜빡이 좀 켜주세요."라고 애절하게 부탁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오랜만에 낯선 길을 운전하며,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며 '그래도 난 차선변경할 때 깜빡이를 잘 켜게 되었구나. 이 쉬운 걸 이제서야.'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생각해 보니 이제 겨우 어른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