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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경희 May 06. 2023

후라노와 비에이 풍경

일본소도시 32  시간과 우연이 만든 마음의 바람

 언젠가 tv 화면의 나무 한 그루, 눈빛에 반사되어 빛이 나던 그 모습에 매료되어 가슴 설렌 기억이 있다.  하얀 눈밭 위에 초록 나무 한그루가 바람에 흔들림 없이 우아한 자태로 서 있던 그 모습!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긴 것은 부드럽게 받쳐주던 능선의 영향도 있었을 터이다. 비에이 패치워크  어느 농가에  서있던 그 나무를 찾아 홋카이도의 배꼽이라 불리는 비에이와 후라노 지역을 가기로 했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노선도 많지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리므로 원데이 투어를 이용했다. 12시간 동안 한국어 안내 및 가이드가 사진 촬영을 도와준다는 것이 마음에 들어 신청했다.

 

비에이 크리스마스 트리-홋가이토 투어



 삿포로역 북광장 사계채관 앞에서 8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는데 조금 일찍 가서 차분한 인상의 가이드를 만났다. 꽤 연륜이 느껴지는 여성 가이드는 30년 넘게 삿포로에 거주하셨다고 한다.  홋카이도 지도를 펴고 경로와 위치 등을 사전 브리핑하였다.


스나가와 휴게소

 

버스는 약 1시간 정도 달린 후 모래가 흐르는 강이라는 뜻의 스나가와 휴게소에 들렀고, 커피와 아이스크림 외 아기자기한 홋카이도 굿즈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넌지시 구경만 하고 간단 식사 대용품으로 치즈와 우유를 샀다. 다시 버스는 1시간을 달려 후라노에 도착하는 동안에도 눈이 쌓인 나무들과 하얗게 드러난 자작나무들, 넓은 호수를 가득 채운 설원이 계속 이어졌다.

    

후라노 가는 길 자작나무
비에이 가는 길의 설원

 


드디어 후라노의 언덕, 팜토미타! 매년 약 100만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이곳은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개화 시기와 특징이 다른 4종의 라벤더들이 보랏빛으로 피어나는 곳이다. 라벤더 외 매리골드나 안개꽃, 포피 등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120,000㎡의 농원을 색색으로 화려하게 수를 놓는다. 무료입장 대신 라벤더 아이스크림과 오일, 향수와 상큼한 메론을 만나게 된다.              

     

라벤더 아이스크림-팜도미타농장 홈페이지

 


팜도미타 개척자 도미타 도쿠마는 1937년 프랑스에서 라벤더 씨 5kg를 입수, 각지에서 시험 재배하고, 증류에 의한 라벤더 오일 추출에 성공하여 1970년 전성기에는 오일 5t을 생산하기도 했다. 1972년 이후 합성향료의 기술 진보와 무역자유화 등으로 수입 향료가 많아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라벤더 재배를 접으려 마음먹은 날, 꿈에 라벤더 요정이 찾아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라벤더를 유지하면서 대체 작물을 고민하던 중 한 기자의 라벤더 사진이 전국에 배부되는 jr 달력에 실리게 되었다. 이후 라벤더에 대한 관심 증대와 오리지널 향수 후라노를 제조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라벤더 스토리와 꿋꿋한 뚝심은 많은 사람들을 후라노로 불러들였고, 13군데 꽃의 향연을 만나러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는 여름 여행지의 대표 명소가 되었다.    

 주말이나 성수기에 후라노와 비에이를 이어주는 노로코트레인 임시열차가 라벤더바타케 간이역에서 출발, JR나카후라노역에서 1.7km 걸어가면 팜토미타에 도착한다.    


팜도미타 농장의 안내판



겨울의 팜도미타는 완전히 다른 세상, 화이트 시즌으로 탈바꿈한다. 눈으로 새하얗게 물들어 있는 벌판과 포플러 가로수, 반짝이며 떨어지는 눈송이로 윈터 가든이 열린다.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웰컴 하우스와 드라이플라워하우스, 벽돌건물 갤러리는 오후 16시 30분까지 문을 열고 있다.

 갤러리에는 팜도미타의 사계절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환상적이다.  파란 하늘에 보랏빛 라벤더가 길게 이어져있고, 무지개꽃밭에 다양한 꽃들의 사진이 칸칸이 들어있다. 여름 라벤더 보랏빛 향연은 땅에 수 좋은 한 편의 작품이다. 더불어 눈으로 덮인 팜도미타와 멀리 배경이 되어주는 활화산인 도카치다케 산 장관도 또 다른 매력이다.           


여름 색색의 화려한 라벤더-홈페이지
겨울 눈 속에 숨 쉬는  둥근 라벤더-홈페이지

  

         

후라노에서 비에이로 향하던 중 만난 호쿠세이 전망대는 뾰족하게 생긴 피라미드형 지붕이 있는 구조물로 드넓게 펼쳐진 설원을 구경하는 곳이다. 언덕의 경사 고저가 롤러코스터 같다고 붙여진 이름의 제트코스터 로드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파노라마로드를 지나 비에이로 향했다.      


호쿠세이 전망대



비에이와 후라노를 잇는 파노라마로드는 드라이브코스로 인기 있는 곳이다. 3월이라 아직 설경을 감상하고 지나갔다. 후라노라는 지명은 원주민 아이누어로 유황 냄새가 나는 땅이라는 의미이며, 비에이초는 기름기가 많다는 의미이다. 여유롭게 느리게 걷는 삶이 느껴지는 목가적 아름다움은 영화와 드라마 및 CF 촬영의 배경이 되어 나도 모르게 익숙하게 되는 곳이다.           


파노라마 로드



 탁신관은 비에이의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을 30년 동안 촬영한 마에다 신조의 사진 작품들과 취미로 수집한 카메라 등을 전시한 갤러리이다. 도쿄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마에다신조는 취미생활로 인물사진을 찍던 중 48세에 일본 종단여행을 시작, 그 여행길에서 만난  비에이와 후라노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갤러리 내부에는 다양한 시선과 색감으로 전시된 사진들이 젝 각각 모습으로 빛나고 있다. 찰나의 순간을 붙잡아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사진이다.  그는 설원 속 참고 기다리는 비에이의 풍경부터 화려하게 터트리는 여름날의 라벤더까지 긴 호흡을 했을 것이다.

1987년 폐교한 비에이 소학교 터에, 비에이 협력으로 개관했으며, 현재 그의 아들 마에다 아키라가 관리하고 있다.  평소 마에다 신조가 좋아했다는 자작나무 회랑이 뒤편에  둥글게 이어져 있어 한 바퀴 돌아 산책하고 나왔다.


탁신관  갤러리
탁신관 자작나무 회랑길


                           

5만 평에 이르는 사계채의 언덕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꽃 잔치, 겨울에는 눈썰매와 레포츠의 장소로 변한다. 여름에는 더없이 화려한 언덕을 만들어내겠지만, 야트막한 구릉들이 오밀조밀 펼치는 설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비에이 역으로 향했다.     


비에이 역 앞에 서있는 택시들
1시간에 1대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는 순간



 연평균 18만 명이 이용하는 비에이 역은 한 시간에 1량짜리 1대 정도의 기차가 지나고 있다. 이용자보다는 관광객이 훨씬 더 많은 곳으로 자체도 유명하여 광고에 종종 나오는 곳이다. 석조 역사가 인상적인 비에이역은 주변에는 관광객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줄 서 있었다.

 비에이 재료, 비에이 우유 , 비에이 야채 제공으로  협정을 맺은 비에이 역 주변의 맛집에는 코에루, 코이야 등 카레우동 전문점과 돈가스 새우튀김 전문점이 있다. 점심은 가이드가 예약해 주어서 쥰페이 새우튀김 정식을 먹었다.


마을을 둘러보니 건물마다 번호가 적혀있는데 이곳에 정착한 년도를 표시하고 있다. 눈이 흘러내리도록 세모난 모양의 지붕들이 많았고, 유럽풍의 거리는 작지만 정갈하고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빵집에서 갓 구운 빵과 완두콩을 넣은 비에이 쿠키를 샀다.


유럽풍의 비에이 거리
비에이 패치워크를 상징하는 장식

     


패치워크는 색깔, 무늬, 크기, 모양이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천을 이어 붙여 하나의 커다란 천으로 만드는 수공예품이다. 농업이 활성화되고 있는 비에이의 광대한 구릉지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그 풍경이 마치 패치 워크처럼 규칙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패치워크의 언덕이라 불리게 되었다.

3월의 패치워크는 눈 속에 가려져 하얀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이었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여름의 이곳도 좋지만, 이런 수묵화 느낌의 패치워크를 만나는 것도 꽤 즐겁다.


비에이 패치워크 로드



 크리스마스트리는 넓은 들판 위에 나 홀로 서있는 나무로 생김새가 크리스마스트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의 시선과 관심을 한눈에 받았던 바로 그 나무는 그 자리에서 여전히 그렇게 서 있다. 나의 마음에도 나무 한그루 굳건하게 심었다.


 좌우 대칭의 특징이 드러나는 나무로 한국관광객이 이름 붙여 크리스마스트리라 한다. 개인 사유지이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도로에 차를 세워놓고 모두들 다양한 포즈로 사진 촬영을 했다. 가이드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손 위에 올려놓거나 하트로 구성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었다.  

    

비에이 크리스마스트리-3월



패치워크 언덕 중에 알려진 곳이 여러 곳 있지만, 켄과 메리의 나무는 1972년 닛산 자동차에서 발표한 스카이라인이라는 차종의 CF에 등장해 화제가 된 사시나무이다. 세븐스타의 나무는 1976년에 담배 세븐스타의 디자인 패키지로 사용되면서 유명세를 탄 떡갈나무이다.  하지만, 여행객들은 도로에 줄지어 선 자작나무를 더 반겼다. 역시 겨울 비에이 언덕에는 하얀 자작나무가 더 어울리는 듯하다.


캔과 메리의 나무
세븐스타 나무
패치워크 언덕 자작나무



2020년에 비에이를 배경으로 하는 ‘마음에 부는 바람’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겨울연가의 윤석호감독이 일본 홋카이도에서 촬영한 첫 영화이다.

 

영국에서 찾아온 비디오 아티스트 료스케 히다카는 휴대폰을 숙소에 놓고가고, 몰고 가던 작은 트럭마저 고장나 연락할 방법이 없어 민가를 찾아 벨을 누른다. 문 앞에는 23년 전 헤어졌던 첫사랑 하루카가 서있고...     

서먹했던 재회는 옛 시절의 이야기로 마음을 열고, 아름다움을 담는 사진 촬영에 동행한다. 시간과 우연이 만든 벽면에 빗방울이 더해져 계속 변화되는 비디오를 촬영한다. 내일도 패치워크 언덕에서 기다린다는 히다카의 말에 하루카는 마음이 복잡하다. 들판에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히다카와 하루카의 마음속 망설임과 설레임을 바람으로 표현해 준 세련된 연출의 영화였다.


마음에 부는 바람-영화 장면
우연과 시간이 만들어낸 작품



다시 촬영에 동행하고, 하늘과 구름, 바람과 나뭇잎, 밤하늘의 별과 패치워크 언덕, 호수너머의 도카치다케의 모습이 동영상 자료로 담긴다.

내일이면 떠난다는 히다카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함께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찾아간 곳은 청의호. 투명한 파란 호수를 바라보며, 이별이 아쉬워 하루카는 아름다운 것은 짧다고 말한다.  같이 있고 싶다는 히다카를 따라 그녀 역시 공항으로 향했으나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만나게 되고, 말없이 떠나가는 그녀를 보내야만 했다. 


청의호의 아침 장면-영화 장면

    


 청의호의 사계절이 흐르고,  그림작가에 전념하고 있던 어느 날, 하루카는 초대장을 받고 히다카의 전시회장을 찾았다. 둘이 같이 촬영한 비디오 작품을 바라보다, 고교시절 약속한 오로라의 사진을 발견하며 회상에 젖는데 작가 프로필 마지막에 런던에서 사망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친구는 오로라를 찍으러 가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을 남기며, 유언에 따라 청의호에 시신을 뿌렸다고 한다. 청의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을 남기며 영화는 끝났다.  

   

 기적 같았던 3일 동안의 아름다웠던 추억과 비에이의 아름다운 영상미.  바람이 부는 날은 마음에도 바람이 분다고 하는데, 청의호는 그때부터 나의 바람이었다. 3월의 청의호는 하얀 눈에 덮여 마른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었고, 영화 속 파란 호수는 5월이나 되어야 볼 수 있다. 그래서 홋가이도는 몇 번을 가야 하는 여행지인가 보다.  


청의호의 겨울-영화장면

                 


1988년 토카치다케화산 분화를 막으려는 주민들이 제방을 쌓았는데 비에이강의 하천수가 온천물에 스며들어 수영장 같은 빛깔의 호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비에이 블루라고 불리는 매혹적인 청의 호수는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코발트블루의 수면에 하얗게 마른나무들이 선 채로 어우러진 환상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애플의 Mac 배경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스폿이며, 1998년 다카하시 마유미라는 가미 후라노 지역의 사진작가가 포착하여 사진집에 게재한 후 입소문을 타고 프로,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호수 상류지역에 있는 시로가네 온천수에 포함된 알루미늄이 함유된 물이 섞임으로써 콜로이드질이란 입자가 만들어졌고, 그 모습이 태양광에 반사되면서 코발트블루빛으로 빛난다. 계절이나 시간, 날씨에 따라 색상이 변화하는데, 오뉴월 태양이 떠오를 때의 시간과 겨울에는 호수 위에 눈이 쌓여 라이트 업하는 시간대가 더욱 좋다.  5월이 되어야 코발트블루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추위와 눈 속에  필사적으로 서있는 수목의 모습들에게서 강건함을 느끼는 것도 좋다.  

         

청의 호수에서 5분 거리  흰 수염 폭포를 보러 시로가네 온천마을에 있는 화이트톤의 철제 다리 위로 갔다.  계곡 절벽 바위 용암층의 갈라진 틈새에서 가늘게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하얀 수염을 닮았다 해 흰 수염 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폭은 약 40m이다. 폭포 바로 위에는 시로가네 온천이 있어 간혹 온천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흰 수염 폭포는 영하 20도 정도가 되는 비에이의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해서 폭포가 흐른다.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나뭇가지에 붙어 눈꽃이 되는 수빙을 볼 수 있다.  

              

청의호로 흐르는 흰수염 폭포-3월 모습
수증기가 눈꽃이 되는 수빙모습-한겨울



후라노 프린스호텔에 있는 낭구르 테라스는 15동의 로그하우스가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마치 그림책 속의 세계에 빠져든 듯한 경치를 즐길 수 있다. 낭구르는 작은 요정, 숲의 지혜자를 의미한다. 아기자기한 일본의 감성이 보이지만, 모두 수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하는데 가격이 비싼 편이다. 만화경이나 가죽 공방, 은 세공, 향초, 액세서리 등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상품들이 가득하다.    


프린스 호텔 안에 있는 쇼핑센터에서 애플와인과 감자칩 등을 구입했다.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도카치다케와 푸른 비에이강의 줄기가 다시 오라고 손가락 거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삿포로역으로 돌아가면서  여름에 다시 와서 비에이 여행기와 사진을 풍성하게 완성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마음에 불어온 바람은 쉽게 사그러지지 않을 듯 하다.

                                                

낭구르 테라스 요정마을
비에이강과 도카치다케 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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