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와 도마씨
나는 자신의 선호도를 “나는 이것이 좋아,” “저건 아니야” 라는 식으로 똑 부러지게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어떻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저렇게도 선명하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심리상담가는 사람들의 내면의 욕구를 알아채도록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심리 상담은 그들이 자신의 욕구를 알아채도록 의도적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다. 그래서 자기 욕구를 잘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 반갑다. 물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어떻게)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긴 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 것’은 잘 알면서도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무엇때문에 불편한지 질문하면 금방 대답하지만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에는 "예?"라고 답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예민하게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주저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자신의 선호도를 도드라지게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 역시 어색하다. 어린아이 처럼 맛있는 과자를 손에 꼭 쥐고 있는데 귀엽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선호도를 강하게 주장하면 오히려 그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배척하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욕구로 상대방을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렸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욕구 표현이다. 그런 말을 할 때 그 당당함이 긴장감을 불러일으켜서 불편하다. 아무리 선한 내용을 이야기해도 마찬가지다. 옳은 것을 이야기 할 때 더 긴장하게 된다. 위축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토마스가 옳다고 말하는 삶 근처에도 못 가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적다.
토마스는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 분명하고 명료하다. 뾰족한 그의 얼굴 (구글에서 찾은 이미지가 실제 얼굴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렇게 전승되어 내려온 이유가 있지 않을까)에서도 느껴지는 기운이 있다. 그의 말투는 이렇다
결국엔 썩어 없어질 부를 추구하고 우리의 희망을 거기에 두는 것은 헛된 일이다. 명예를 추구하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 또한 헛된 일이다... 오래 살기만을 바라고 훌륭한 삶을 영위하는 데에 무관심한 것도 헛된 일이다. 오직 현재의 삶만 생각하고 다가올 삶에 대해 예측하지 않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일시적인 것에만 애착을 갖고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가지 않는 것도 헛되도다(p. 25)
무엇이 헛된 것인지 이렇게도 명료하다. 일시적과 영원한 것을 가르고 이것은 헛되고 저것은 가치있다고 토마스는 말한다. 나는 이글을 아이스커피와 버터 비스킷을 앞에 놓고 쓰고 있다. 오렌지 잼을 바른 비스킷도 맛있고 쓰고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모금에 즐겁다. 그러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흘러가는 구름에 순간 인생이 시나브로 커피속 얼음처럼 녹아 없어지는 것을 감지한다. 나는 분명 명예를 추구하고 나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오래 오래 이 땅에 사는 것이 간절하지 않다. 그런데도 헛되다고,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을 주춤하고 있다.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를 판단하는 일은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다. 특히 그 판단이 사람들과 연결되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판단이 서기까지 오래 걸린다. 말로 전달하기까지는 더 걸린다. 내가 이것과 저것의 가치 가르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편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을 판단한 순간 나는 그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책임 질 일이 많아진다. 게다가 사람들의 감정을 그것도 부정적으로 자극할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것이다. 그 긴장감을 감수해야 한다. 이미 불편하다.
선호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은 욕심 말이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다’라고 결정하면 이것만이 내 것이 되고 저것은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모든 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일 수 있다. 짬뽕과 짜장면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두 개를 다 먹고 싶어서니까.
요즘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교회에서도 잘 듣지 못하는 말투이다. 특히 ‘부’에 관한 설교를 딱 잘라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상당히 크다. 사람들이 교회에 안 올 수 있는 위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이 헛것이라고 말하면 기분이 별로 안 좋다.
혹은 매우 순진한 표정으로 “그런 욕심을 갖는게 그렇게 나쁜 건가요?” 묻기라도 한다면 갑자기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거다. 부자되고 싶은게 그렇게 나쁜 건가요?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은게 그렇게 나쁜 건가요? 자기만을 위해 사는게 그렇게 나쁜 건가요? 내가 좀 편하게 살고 싶은 게 그렇게 나쁜건가요? ‘그렇게’라는 말을 약간 강조하면 더욱 동조하게 될 수 있다. “그러게, 사람이 다 그렇지. 그게 뭐 그렇게 나쁜가?” 이런 분위기에 쏠리면 이 생각이 보편적이라고 믿게된다.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고 한다. 너무 훌륭하게 살려고도 하지 말라고 한다. 많은 문제들이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해서 생기는 거라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우리 사회는 서로 너무 최선을 다해 사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토마스는 환영받지 못 할 사람이다. 이것과 저것 모두를 가지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애쓰다 애쓰다 지쳐 떨어져 나간 사람들에게 그의 말은동기부여가 되지도 위안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기부여가 필요한 사람들은 자기 계발서를, 위안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대중 심리학 책들을 찾을 것이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를 쓴 사람들이다. 이것저것 다 해보았는데도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일상 생활을 겨우 유지해가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삶을 영위하는데 무관심함’을 탓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가? 남편의 외도와 이혼으로 좌절한 그는 훌륭한 삶을 추구할 수 없는가? 마치 심리사회적으로 좌절을 겪은 사람이 훌륭한 삶을 바라보는 것은 언감생심인 것처럼 우리 사회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심리상담 전문가들이 심리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존재론적 목표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보호라는 이름 아래 성장을 제한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훌륭한 삶이 무엇인가에 따라 좌표점이 다를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 그러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이라는 말로 나의 이기심을 정당화 할 수 없다. 무기력한 사람이라고 해서 훌륭한 삶을 영위하는 것에 무관심한 것을 당연시 여기고 건강하게 살기만을 바라는 것은 토마스 말을 다시 한번 빌리자면 ‘헛된 일’이다. 여전히 그것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고 조금은 의미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회색지대를 맴돌아 본다.
그러나ㅡ 선호도의 명료함도 좋다. 특히 그것이 '좋음(goodness)'에 관한 것이라면.